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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석 - 친구야, 싱건지 한 대접 할래?

플레이광주 2 272 03.13 09:34


최근 97세 어머니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우등, 개근, 합격, 취업, 결혼, 승진 등 수많은 칭찬을 받아왔지만, 이번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 내가 직접 만든 성과물에 대한 칭찬이어서 더 그랬을까? 내가 담근 싱건지를 드시고는 어머니가 아따, 맛있다. 잘 담갔다.”고 하셨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더니, 환갑이 넘은 아들도 들뜰 수밖에 없었다. 병치레로 약해지신 어머니가 밥맛이 없어 하시길래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싱건지가 떠올랐다. 예전에 몇 번 담가 본 적이 있었다. 레시피에 의존하지 않고 어렸을 적 먹었던 기억, 고향에 갈 때마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그 손맛을 떠올리며 담갔다. 기억에 의존해 만든 것이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 칭찬은 가슴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 싱건지 [사진 : 전통향토음식 용어사전] -

 

싱건지는 싱거워야 돼. 둘둘 둘러 마실 수 있어야지. 싱건지는 간을 잘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해.” 어머니는 동네 요리사셨다. 시골에서도 우리 집에 와서 김치나 조림 등 요리 비법을 배워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싱건지는 최고 인기였다. 아버지의 친구들도 우리 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자주 하셨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안주는 찬사를 받았는데, 싱건지는 단골 메뉴였다. “형수가 담근 싱건지 한 대접이면 세상 시름이 확 내려간당께.”

 

싱건지에 대한 첫 기억은 이랬다.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이 얼어 바삭거리는 겨울날, 밥상 위에 올라온 싱건지에는 살얼음이 동동 떠 있었다. 그 살얼음을 하나라도 더 씹어 먹고 싶어 아버지보다 숟가락을 먼저 들다 혼났던 그때의 욕심이 떠오른다. 밤고구마를 먹고 목이 멜 때는 싱건지국이 소화제였다. 싱건지국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의 그 시원함, 트림으로 마무리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십여 년 전 여름, 등산을 갔을 때의 일도 떠오른다. 점심을 먹으려는데 후배가 싱건지를 내놓았다. 산에서 싱건지라니, 정성이 대단했다. 보온병에 싱건지국을 담고, 무와 무청을 따로 준비해 왔다. 거기에 얼음까지 챙겨왔다. 한 그릇에 담아내니 그야말로 천하의 별미였다. 땀을 흘리고 난 후 마신 차가운 싱건지국의 시큼함과 청량감, 그 순간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싱건지를 제대로 담가보고 싶어졌다.

 

싱건지는 싱건+로 나뉜다. ‘싱건싱거운의 줄임말이고, ‘는 김치를 뜻한다. 묵은지를 오래된 김치라 하듯이, 싱건지는 싱거운 김치라는 의미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소금물에 삼삼하게 담근 무김치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를 물김치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왠지 정감이 떨어진다.


내가 담근 싱건지는 일반 동치미보다 숙성 기간이 짧다. 내 방식은 이렇다. 무를 소금에 절이고 물을 부은 뒤, 마늘, 생강, , 고추, 쌀죽, , 뉴슈가를 넣는다. 배가 비싸면 배 음료로 대체하기도 한다. 어려울 것도 없다. 싱거우면 소금을 조금 더 넣고, 짜면 물을 더 부어 간을 맞추면 된다. 베란다에서 하루 이틀 숙성시키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김치통을 열어 보면 싱건지국에 보글보글 기포가 생긴다. 발효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잘 익은 싱건지는 깊고 오묘한 감칠맛을 낸다. 무는 단단한 듯하면서도 적당히 아삭하고, 국물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적당한 신맛과 단맛, 깔끔한 감칠맛이 조화를 이루며, 입 안에 남는 개운한 여운이 일품이다.

 

누구나 소울 푸드가 있다. 주로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을 소울 푸드로 여긴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해외로 이민 간 지 수십 년 된 동포들도 어린 시절 어머니 손맛을 기억하며 음식을 만들지 않는가? 나 역시 소울 푸드 하나를 꼽으라면 싱건지이다.


싱건지는 단순히 싱겁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자연 그대로의 맛, 식재료 본연의 풍미를 가장 순수하게 끌어내는 음식이다. 간이 들어 있긴 하지만 약간은 심심한 무의 은근한 맛은 절제 속에서 깊은 풍미를 전한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오히려 미각을 깨우는 맛이다.


싱건지 맛이 주는 특별함은 그 절제에 있다. 과하지 않기에 더 많은 여백이 느껴지고, 이 여백은 더 큰 풍미와 여운을 남긴다. 이는 동양화의 빈 여백과도 같다. 화려한 채색의 그림이 즉각적인 시각적 쾌감을 주는 반면, 여백이 많은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하고 조용한 감동을 준다. 싱건지 맛도 그렇다. 자극적인 향신료와 과한 양념 없이도 깊고 긴 여운을 남긴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오랫동안 여운을 주는 친구, 과장 없는 진솔한 관계를 선호한다. 필요 이상의 것을 덧붙이지 않고도 온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다. 아직 그런 분들과 싱건지를 함께 나누진 못했다. 언젠가 내가 담근 싱건지를 앞에 두고 그들과 소박한 맛을 나누고 싶다.

친구야, 싱건지 한 대접 할래?”




 

Comments

03.13 11:29
글을 읽었을뿐인데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입니다. 꿀꺽
플레이광주 03.18 15:36
싱건지만큼이나 글 맛도 최고입니다. 맛있습니다. 여백의 맛이 싱건지라면 글은 삼삼한듯 하지만 꽉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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