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 직장의 일은 기존에 해오던 일과 다르다. 많고 적을 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회사에서 인사 이동으로 부서를 옮겨가면 부서에 따라 분위기와 일이 달랐던 경험은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재취업은 더구나 회사를 옮긴 일자리다. 따라서 다른 정도는 클 수밖에 없다.
재취업한 사람은 누구나 그 회사의 신입사원이다.(경력직으로 취업해도 적응에 시간이 걸린다) 신입사원이 경력사원이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정년퇴직했건 아니면 명예퇴직했건 이전 직장에서의 근무 기간은 의미가 없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모든 것을 새로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전 직장에서의 직급이나 직책도 잊어야 한다. 직급이나 직책을 내세우는 순간 새 직장에서는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한다. 듣는 상대에게서‘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응을 받는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사랑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전 직장에서 쌓았던 업무 지식과 사람 관계, 컴퓨터를 활용한 사무 능력은 큰 자산이다. 잊으라는 것은 먼저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다.
나도 이전 직장에서 습득한 지식과 능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업무라 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업무와 대비해 배우니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는 대용량 전자교환기 신설 작업에 필요했던 모든 상황을 새로 짓는 아파트와 대비하며 이해하며 배웠다.
나이 든 사람이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 든 사람이 공부하며 배울 때 가장 큰 장애물은 기억력이다. 나이가 들면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부분이 약해지고, 시냅스 형성이 잘못되면서 기억력이 떨어진다. 나는 기억력 감소를 기록으로 메꿨다. ‘적자생존’이다. 새로운 직장에서 배운 모든 것을 노트에 적었다. 처음엔 이면지에 적고,이를 노트에 옮겨 적으며 복습했다.
그림과 표를 삽입하고 나만 알아먹는 방식으로 적는다. 이러한 나만의 노트 만들기는 사실 첫 직장에서부터였다. 대형컴퓨터인 전자교환기에서 고장 경보가 발생하면, 선배에게서 배우거나, 매뉴얼을 찾아보며 수리했다.
내가 운용 및 유지보수하던 교환기는 스웨덴 에릭슨사에서 만든AXE계열 교환기다. 영어나 우리글로 번역한 매뉴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뉴얼에서 중요한 내용을 나만의 방식으로 바꿔 적었다. 이렇게 만든 노트로 같은 고장을 빠르게 조치했다. 몇 년 만에 발생하는 고장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만의 노트는 내가 첫 직장에서 누구보다 빨리 승진한 비결이다. 요즘은 이면지에서 노트로 옮기는 대신 컴퓨터 파일로 옮긴다. 컴퓨터로 만든 파일은 훨씬 더 빨리 찾을 수 있고, 추가와 삭제 및 수정이 자유롭다. 건축 현장에서 사용하는 서류,업무처리 절차, 경비 처리 등 모든 것을 컴퓨터 파일에 기록한다. 필요한 경우 종이 내용을 스캔 파일로 만들어 저장한다. 날이 갈수록 컴퓨터 파일 용량이 커지고, 이는 재취업한 건축 분야 일에서 내 자산이 된다. 사람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지만,기록해 두면 기억력 감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 관계는 어느 회사든 똑같다. 어디나 고마운 사람이 있고 얄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운 일터에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잘 해왔으면 늘 해왔던 대로 하면 되고, 아쉬운 점이 있으면, 리셋해서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된다.
건설 현장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지만, 내가 일하는 전기 설비 분야에선 아직 우리나라 사람이 많고, 젊은 사람도 있다. 나는 현장에서 만나는모든 사람에게 먼저 인사한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사람이 보이면 고개 숙여 인사한다. 상대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 기분 나쁘다며 인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사를 받아주고 안 받아주고는 그 사람의 문제일 뿐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습관처럼 내 마음이 편하게 먼저 인사한다.
내 아들보다 더 어린 사람에게도 먼저 인사하고, 외국인에게도 인사한다. 대화할 때는 상대가 어린 사람이라도 존댓말을 써서 공손하게 한다. 나를 낮춰야 내가 높아짐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말하기보다 들어주기다. 말을 들으며 적절한 추임새를 넣는다. ‘끌림의 법칙’에 따르면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자기 말 들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는 말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생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잘 들어주면 상대는 존중과 이해받는다고 느끼며, 나를 좋아하게 된다.
이렇게 말을 줄이니 공사 현장에서 나를 신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때때로 인생 선배로서 나에게 상담 요청해오는 경우도 생긴다. 이때도 나는 최소한으로 말하고 들어주며 상대가 스스로 답을 찾게 해준다. 이러한 방법은 퇴직 전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배우며 터득했다.
업무와 상관없이 내가 계속 노력하며 이루고 싶은 것은 글쓰기다. 대학생 때 교내 백일장에서 글쓰기로 상을 받았다. 이후로 글쓰기보다는 문서를 기안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며 회사 업무 관련 일만 했다. 퇴직 무렵에 여유가 생기자 다시 글을 쓰며 수필가로 등단했다. 이후 광주 서구 문화원 주최 백일장대회, 전국 시민기자 기사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시민기자로 글을 쓰고, 서포터즈로 블로그를 작성하는 틈틈이 나만의 글을 쓴다.
글을 마치면서 보니 재취업 일터에서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보통의 삶에서 살아남는 법이 됐다. 내가 추구하는 삶이라 그렇다. 미리 포기하지 말자. 뭐라도 좋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무언가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먼저 왔다 먼저 가는 사람으로서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길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