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제를 모셔온 신성한 산, 무등산
고대 제천의례의 공간, 무등산
일찍이 다산 정약용이 무등산을 유(遊)하면서 느낀 감회를 적은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서석산은 험준하고 커서 이 산은 7개의 군현(郡縣)에 걸쳐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적상산이 바라보이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멀리 보인다. 그리고 월출산과 송광산 같은 산은 모두 어린 자식이나 손자 격이다. 위에는 13개 봉우리가 있는데 항상 흰 구름이 둘러 있다.
(중략) 대체로 산수가 뛰어난 곳은 반드시 기암과 깎아지른 절벽, 비천(飛泉)과 괴상한 폭포며, 어지러운 자태와 붉고 푸른 온갖 형상이 갖추어져야만 산경(山經)ㆍ수지(水志)에 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석산은 높고 험준한 것만으로 호남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조공이 홀로 그 산이 여러 산 중에서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산과 그 산을 알아보는 사람이 모두 위대하다 하겠다.(다산시문집 제13권 기(記))
위와 같이 정약용은 무등산을 둘러보고서 그 광경을 담백하게 기술하고 있다. 내용 가운데 조공은 당시 화순사람이었던 조익현으로 그가 정약용에게 무등산에 대해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과 위사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비록 움직이는 흔적은 볼 수 없으되 그의 공화(功化)는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 옛날에도 산은 자연 그대로의 산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지역민들의 삶과 문화가 산과 어우러지면서 산은 단순한 자연물을 넘어 상징적인 의미를 품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무등산에 관한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 ‘무진악’이라 하여 무등산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잡지 제5 지리편에는 무진주(武珍州), 무주(武州)라는 지명이 보이고 잡지 제1 제사편의 소사(小祀)조에 무진악, 무진주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小杞{小祀} : 霜岳[高城郡], 雪岳[隨城郡], 花岳[斤平郡], 鉗岳[七重城], 負兒岳[北漢山州], 月奈岳[月奈郡], 武珍岳[武珍州], 西多山[伯海郡 難知可縣], 月兄山[奈吐郡]...) 당시 무등산인 무진악에서 소사를 모셨다는 것은 무등산이 본읍치제의 대상이 되어 지역에 파견된 중앙관리 혹은 수령의 주관 아래 정기적으로 제를 거행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비록 간략한 기록이지만, 당시 전남지역에서 무등산이 신성한 산으로서 제의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제의를 통해 지역적·문화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기록 이전에도 무등산에서 제를 모셨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우리 민족 최초의 신화인 단군신화의 기록을 보면, 하늘을 숭앙하는 환웅이 태백산의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제를 모셨다는 내용이 전한다. 그 나무가 신단수이고, 그 무리가 신시를 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 속의 태백산은 성산(星山)으로 의미를 갖는다.
단군 이래 산에서 제를 모시는 토속적인 민간신앙은 국가 차원에서, 읍 차원에서, 마을 차원에서 그 규모만 달리할 뿐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거행되고 전승되어 왔다. 앞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무등산의 소사 역시 이러한 민속신앙의 지속적 전승 속에서 그 일부가 기록을 통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국가 차원 그리고 읍 차원에서의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가 거행되었으나, 이러한 제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나 마을 단위에서는 ‘마을신앙’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이에 관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마을신앙은 마을 단위로 음력 정월이면 매년 정기적으로 올리는 당산제, 당제, 골맥이제, 성황제, 철륭제 등과 같은 것으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에게 올리는 제의와 함께 산신의 제의도 포함되어 있다. 마을신앙은 마을이 처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 맞게 고유한 제의를 구성하여 전승해 온 것으로, 제의를 통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민속문화적 의미가 적지 않다.
이러한 점을 두루 고려하면, 무등산에서의 제천의례는 고대부터 거행되었겠지만, 역사 기록으로는 백제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흔적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무등산이 언급된 것은 점차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무등산에서도 제도적이고 정기적인 제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 무등산이란 산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고려사」 악지의 삼국 속악 백제조에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이다.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큰 고을이다. 이 산에 성을 쌓았더니 백성들은 그 덕으로 편안하게 살며 즐거이 노래를 불렀다'(無等山 光州之鎭山. 州在全羅道巨邑. 城此山 民束負以安樂而歌之)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통해 무등산곡(無等山曲)이란 노래가 있었다는 것을 전했다.
이러한 무등산은 일찍이 문화적으로 전남의 진산(鎭山)이며, 남도민들의 신산(神山)이었다. 진산이라 함은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하는 주산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중심의 삼각산을 오악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는 특정의 산이 지역을 진호하는 주산으로 삼는데, 전남지역에서는 무등산과 금성산이 대표적인 진산이었다. 이처럼 단편적인 역사 기록들을 통해서도, 무등산이 제의와 의례를 통해 오랫동안 다양한 종교와 신앙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무등산신의 작호를 받고 제사를 모셨던 무등산
비록 제의 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으나, 「고려사」에는 광주 무등산신에게 작호를 내리고 봄과 가을에 치제를 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庚辰 以光州 無等山神 陰助討賊, 命禮司, 加封爵號, 春秋致祭(「高麗史」 卷二十七 世家 卷第二十七, 元宗 14年 5월)) 이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무등산 제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종 14년인 1273년에 삼별초를 진압할 때 은밀한 가호를 베푼 것에 대한 보답으로 무등산신에게 작호를 더해주고, 봄과 가을로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무등산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한다.
영이(靈異) : 지정 원년 신사【충혜왕(忠惠王) 복위 2년】에 동정원帥 김주정이 각 고을의 성황신에 제사지냈는데, 다니며 이름을 부르면 신령한 일이 나타났으니, 군의 성황 가운데 둑(纛)의 방울을 흔든 것이 셋이었으므로, 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작을 봉하였다. 무등산 꼭대기에 줄바위가 수십 개 있는데, 삐죽하게 선 것이 높이가 백여 자나 된다. 그 산이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차 개려고 할 때에는 우레 소리 같이 우는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 십리에까지 들린다.
무등산신사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신라 때는 소사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를 올렸다. 동정원수 김주정이 각 관청의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례로 신명을 불러 신의 기이함을 징험했다. 그런데 이 광주의 성황신이 큰기[纛旗]의 방울을 울린 것이 세 번이었다. 그래서 김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작위를 봉했다. 본조에 와서도 춘추로 본읍에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제 35권 광산현, 사묘)
위는 조선시대에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지만, 고려 충렬왕 때 김주정이 무등산의 영험을 알려 작위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진산의 산신에게 작호를 내리는 것은 단순히 신산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해당 지역의 위상과 토착 재지세력의 존재를 강화하는 결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산을 경배하는 행위는 단순히 종교적·의례적 차원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국가나 지역 차원에서 의례가 수행될 때에는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위상 역시 함께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에도 무등산에서 제를 모셨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무등산 제의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고을에서 제를 모셨던 무등산
고려시대에 격상된 무등산 제의의 위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조선시대 들어오면 「조선왕조실록」에 무등산에 관한 다음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조에서 경내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을 봉하기를 청하니, 송악의 성황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안변·완산의 성황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무등산·금성산·계룡산·감악산·삼각산·백악의 여러 산과 진주의 성황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의 신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 류경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례조에 명하여 상정한 것이었다.(태조 3권, 2년(1393 계유/명 홍무(洪武) 26년) 1월 21일(정묘))
청하옵건대, 그 영험 여부를 분별하지 말고, 영구히 혁파하였거나 제사 드리는 장소를 모르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가에서 행하는 악(岳)·독(瀆)·산(山)·천(川)의 제품의 예에 따라 국고의 미곡으로 치제하게 하고, 제사 뒤에 감사가 본조에 이문(移文)하는 것으로 긍식을 삼게 하소서 (중략) 전라 관내인 나주의 앙암·용진, 담양 경내 원율의 용진분소, 장흥의 천관산, 무안의 용진명소, 강진의 완도, 영암의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병로지 용당, 용담의 웅진 분소 (중략) (세종 46권, 11년(1429 기유/명 선덕(宣德) 4년) 11월 11일(계축))
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별감의 계본에 의거하여,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하기를, (중략) 무진군의 무등산 묘 위판은 무등산 호국백지신위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호국백위 네 글자를 삭제할 것 (중략)(세종 76권, 19년(1437 정사/명 정통(正統) 2년) 3월 13일(계묘))
위의 기록을 보면 조선 태조 2년에 전국의 명산, 대천, 성황, 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는데, 전남지역에서는 지리산, 금성산과 함께 무등산이 ‘호국백’이라는 작호를 얻는다. 이는 고려시대와 비교하여 나라를 지키는 목적을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한 봉작이라 할 수 있다. 이어 세종 때에는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에 따를 것을 건의하였다. 악·독·산·천의 제도와 예에 따라 제사를 정하였는데, 무등산도 이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 19년에는 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별감의 계본에 의거하여,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하였는데, 무등산의 위판에 적힌 ‘호국백위’를 삭제하도록 했다. 당시 삭제의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이를 통해 무등산 제의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점은 고려 때까지는 나라에서 제사를 모시다가 조선조에 와서 점차 격을 낮추어 고을에서 제를 모신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本朝春秋令 本邑致祭’라는 기록으로 보아 1530년(중종 25) 당시에도 본읍 차원에서 제를 계속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무등산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위의 내용이 전부이다. 이처럼 국가 기록에는 무등산에 관한 내용이 그리 많지 않은 반면, 조선 중후기로 접어들면서 무등산을 소재로 한 유산기(遊山記)의 기록이 크게 늘어난다. 유산기는 말 그대로 무등산을 찾은 감회, 정서, 풍경 등을 술회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 유산기로는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김극기의 시 3수가 전부인 데 비해, 조선조에 들어와 산수유기가 성행하면서 무등산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앞서 「동국여지승람」에 무등산은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차 개려고 할 때에는 우레와 같이 우는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 십리에까지 들린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무등산의 영험성과 신이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정약용은 산 위에 사당이 있고 무당이 이를 지키고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사당(祠堂)이 있는데 무당이 맡고 있다. 그 무당이 말하기를, "벼락과 번개, 구름과 비의 변화가 항상 이 산의 허리에서 일어나서 자욱하게 아래로 내려가는데, 산 위에는 그대로 푸른 하늘입니다." 하니, 굉장히 높은 산이 아닌가.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듯이 세상을 가볍게 보고 홀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고락(苦樂)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다산시문집 제13권 記)
최남선이 무등산을 '천연의 신전으로 일컬으며 전라도 지방의 종교 중심지가 되고 산 전체가 하나의 당산터‘라 했던 것처럼, 무등산은 오래전부터 남도민들의 신앙의 터전이자 정신적 거점으로 자리해 왔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