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상‘s 클래식] 광주에서조차 낯선 ’광주여 영원히‘
< 작곡가 윤이상 >
1967년 6월 17일 독일 베를린 슈판다우 공영 아파트에 오전 7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한국말로 “난 박 대통령의 개인 비서입니다. 대통령께서 당신 앞으로 친서를 보내셨습니다. 가능한 빨리 사보이 호텔로 와 주십시오”
이 전화 한 통이 이후 한 개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둔갑시켜버린 사건.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동백림 사건’이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윤이상 음악가였다. 이후 그는 KCIA에 의해 여권도 없이 납치돼 한국으로 송환된다. 윤 작가는 이후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같은 해 12월 13일 법정에서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의 나이 50세의 일이다.
서독은 이 문제를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규정했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토 클렘펠러 등 수 많은 유럽의 예술인들은 윤 작가의 석방을 위한 탄원서와 항의를 보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도 항의의 표시로 그 해 한국에서 진행될 연주회를 거절했다.
예상보다 더 큰 유럽 사회의 항의에 박 정권은 윤 작가의 사형을 10년 형으로 낮추었고 1969년 3월 결국 석방시켰다. 하지만 그는 이 석방의 의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고향 통영의 앞바다와 영원한 이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1980년 5월 무심코 틀어 두었던 서독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윤 작가는 광주의 참상 소식을 들었다. 이수자 부인에 따르면 그 소식을 접한 윤 작가는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짐승처럼 통곡했다’고 한다.
그는 이듬해인 1981년 광주 항쟁을 보편적 인권 문제와 항거의 의미를 담아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를 작곡하게 된다. 13년 전에 윤 작가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득한 독재자들에 대한 민중의 아픔을 보편적 항거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2022년 광주시향은 임윤찬과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일명 ‘황제’를 연주하게 된다. 광주예술의전당과 여수 예울마루에서 두 번의 공연이 펼쳐진 이 연주는 세계적인 음반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이 라이브로 음반을 제작해 세계적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광주시향과 임윤찬의 협업에 가장 관심을 가졌지만 이 음반에서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는 바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가 수록됐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광주여 영원히’가 한국에서 음원으로 들어간 것은 이 음반이 최초였다.
‘광주여 영원히’는 20여 분 분량의 작품이다. 작품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소절부터 강렬한 첫 번째 부분은 시민 봉기와 군사진압으로 인한 학살 장면, 두 번째 부분은 민중들의 공포에 대한 무감각과 죽음에 대한 흐느낌, 세 번째 부분은 대한민국에서 정의와 민주를 위한 계속적인 노력과 정의를 추구하는 정신의 승전적인 분위기를 암시한다.
어느덧 5·18 민주화운동도 46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하는 보편성의 의미를 갖게 하고자 시도했던 국회의 헌법 전문 개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자국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고문을 당한 광주 시민들의 상처는 또다시 아물지 못하게 됐다.
광주정신의 헌법 전문 개정 실패가 46년 전 윤이상 작가의 전 세계에 광주의 민중항쟁의 정신을 보편화하려던 시도 자체를 무력화 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광주에서 ‘광주여 영원히’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날마다 흘러나오는 것처럼 듣기 힘들다는 점이다.
365일 중 단 하나의 날, 5월 18일만 기억하는 광주라면 광주정신은 그날에 묶여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이제는 광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국에서 ‘광주여 영원히’가 울려 퍼지길 기대해 본다.
하지만, 지금도 윤이상을 간첩의 프레임 안에만 가두려는 시선이 존재하는 한, 그의 음악과 광주의 의미를 온전히 공유하는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