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상’s 클래식]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할 말이 많았나 보다. 교향곡 한 개 연주 시간이 무려 80여 분이 넘는다. 하긴 한 도시가 포위되고 872일이니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하다.
1941년 9월 나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샹트 페테르부르크) 눈앞까지 쳐들어갔다. 독일군은 충분히 레닌그라드를 점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각은 달랐다. 도시 외곽을 철저히 막기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철저히 봉쇄하면 스스로 자멸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독일군의 봉쇄는 무려 3년이나 이어졌다. 이 기간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 풀, 나무껍질, 가죽 등을 먹어가며 버텼지만 100만 명이 넘는 생명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곳을 포기하는 순간 삶의 마지막 의미마저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1941년 레닌그라드의 독일 병사들 사진:Narodowe Archiwum Cyfrowe 2-859 >
그 기간 레닌그라드에는 소련의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도 있었다. 소련의 대표 음악가라고 해서 굶주림과 추위는 피해 가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나서서 참호도 파고 소방대원으로 자원해 폭격으로 파괴된 화재 현장에 참여해 불을 끄기도 했다.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봉쇄전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시민들의 위대성을 알리기 위한 곡을 썼다. 바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새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방 세계도 알고 있었다. 작곡이 완료되자 고립된 자들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악보를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 테헤란과 카이로를 거쳐 미국 뉴욕으로 공수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뉴욕에서는 1942년 7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지휘로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 퍼졌다. 음악은 국경을 넘어 아직 무너지지 않은 도시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했다.
한 달 뒤 이 곡은 레닌그라드에서도 은퇴한 단원들과 음악 교육을 받은 군인들까지 동원해 가까스로 연주됐다. 그 무대는 완전한 음악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연주보다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는 선언이었다.
지난 10일 광주시향이 광주 예술의전당에서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연주했다. 121명의 단원이 함께한 이 무대는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가 돋보인 연주였다.
특히 1악장이 시작되고 7분 뒤에 나오는 350마디의 작은 북의 반복은 라벨의 볼레로를 연상시키면서 묘한 긴장감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이 아직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았다.
광주시향의 이날 무대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교향악 축제의 프리뷰 성격이 강했다. 매년 4월에 열리는 교향악 축제는 올해 19개 교향악단이 참가하고 있다.
광주시향이 올해 메인 타이틀로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를 무대에 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중동사태를 바라보면서 선곡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지만 시향이 한 해 짜는 스케줄은 지난해에 이미 선정한 전례를 살펴볼 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리 계획했든 아니든 이번 선곡은 현재 세계정세로 볼 때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이란과 일부 중동국가의 무고한 시민들이 폭격으로 인해 아비규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주는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전쟁은 소수의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의지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참혹한 게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닌그라드의 이야기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2026년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만큼은 레닌그라드 교향곡 4악장의 결말이 환희로 끝나듯 이번에도 민중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환희를 맛보는 결말이 되기를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