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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쓰는 레시피] ep3. 누룽지의 시간

곽복임| |댓글 0 | 조회수 123

[ 사진 : 누룽지   Ⓒ뽀기미 ]


 



〈딸에게 쓰는 레시피〉는 엄마가 계절의 재료와 사회의 온도를 살펴 딸에게 응원 한 그릇 내놓는 엄마카세다.


ep3. 누룽지의 시간 



#좋아하는 것에도 때가 있다.


3월 초, 엄마가 사흘간 크게 앓았어. 이게 다 꼬막 때문이었어. 겨우 내 몇 번 못 먹어서 아쉬웠던 참에 재래시장에서 꼬막을 발견하고는 눈이 번쩍였지.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아빠 엄마가 워낙에 좋아하는 음식이라 “괜찮겠지” 하고 넘긴 게 그만 탈이 제대로 났어. 좋아하는 것 앞에서 사람은 자주 이성을 잃는다지. 그날 엄마가 그랬어.


이성을 잃었더니 몸이 먼저 무너졌어. 속이 뒤집히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하루를 거의 통째로 비워냈지. 망가지는 건 늘 그렇게 한순간이야. 그제야 3월 꼬막은 먹지 말라던 돌아가신 네 외할머니 말이 생각난 거야. 몸으로 알고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 말이었지.


혼자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면 더 당황스럽지. 화장실을 오가면서도 정신이 아득해질 수 있어. 그럴 땐 억지로 뭘 먹으려 하지 말고, 물이나 보리차를 조금씩 나눠 마셔서 탈수를 막는 게 먼저야. 엄마는 토사곽란이 이어지면서 기운이 바닥나는 탈진 상태가 올까 봐 집에 비상용으로 둔 링*를 타서 마시고 바나나를 조금씩 먹어줬어. 그런데도 증상이 가라앉지 않으면 참지 말고, 병원에 가야 해.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야. 그 시간을 지나는 방법이 따로 있을 뿐이야.



#누룽지의 시간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고 나서야, 몸은 단순한 걸 찾더라. 뜨겁게 끓인 누룽지 한 그릇. 간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는 음식인데, 이상하게 그런 순간에는 그게 가장 먼저 떠올라.


그 누룽지는 네 아빠가 끓인 거였어. 처음 끓여보는 거라 물도 양도 어딘가 어설펐고, 솔직히 말하면 놀라울 정도로 맛이 없었어. 물만 붓고 끓이면 되는 걸 어떻게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지 싶었고, 양은 또 왜 그렇게 많이 끓여놓은 건지 한숨이 나왔지. 결국 3일 내내 그 누룽지를 먹었어. 맛있어서 먹은 게 아니라 살려고 먹었다는 말이 더 맞을 거야. 그때는 맛보다 몸이 먼저였으니까. 그렇다고 남길 수도 없어서 묵묵히 먹었고, 덕분에 다른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사라졌어. 이상하게도 그 단순한 식사가 몸을 가장 안정적으로 붙잡아 주더라. 자극도 없고, 욕심도 없고, 그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들어오는 음식이었거든.


누룽지는 사실 어려운 음식이 아니야. 물을 넉넉히 붓고 약한 불에서 천천히 끓이면 돼. 급하게 끓이거나 물이 부족하면 딱딱해지고 속이 불편해지지. 결국 이것도 속도의 문제야. 천천히 풀어지고, 천천히 익어야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거지.


생각해 보면 너는 누룽지를 참 좋아했어. 바삭하게 눌린 밥에 물을 부어 부드럽게 풀어내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운 고등어를 곁들이면 그걸 그렇게 잘 먹었지. 그때는 그게 그냥 네가 좋아하는 음식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이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3일을 보내고 나니, 그제야 속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 들더라. 회복식으로 간단히 전복죽을 끓여 먹고 나서야 몸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


[ 사진 : 전복죽   Ⓒ뽀기미 ]



#너의 속도를 잊지 말자.


3월의 시작은 늘 비슷한 듯 달라. 새로운 시간표, 처음 듣는 강의, 이제야 시작하는 공부. 하고 싶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열리는 시기라 조금 더 욕심을 내게 돼. 이번엔 다 해보겠다고, 조금 더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계절이지.


그 마음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다만, 좋아하는 걸 시작할 때 사람은 자주 자기 속도를 잊는다는 걸 기억해. 너도 지금 그런 시기일 거야.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해서 좋고,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 그래서 더 많이 하게 되는 시간. 그 마음을 알지.


속이라는 게, 그렇게 빨리 익는 게 아니더라. 급하게 채운 건 결국 다시 비워내게 되고. 혹시 버거워지는 날이 오면, 그땐 누룽지 한 그릇처럼 가장 단순한 것부터 다시 시작해도 돼. 조금 돌아가는 것 같아도, 그게 결국 더 빠를 때가 있어.


그리고 너를 향한 엄마의 사랑은 언제나 제철이야. 알지? 엄마는 항상 네 편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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