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진의 로컬&지역발전 이야기] 시민이 만들고 완성하는 열린 라키비움’을 꿈꾸며
- 서말의 구슬을 꿰는 지혜로움으로 -
들어가는 말
# 필자는 고교시절이나 대학시절 공부했던 책들이나 기록물(편지, 엽서, 메모, 다이어리, 리포트 등) 중 상당수를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책장에도 삼중당문고, 범우에세이, 창작과비평사 소설 등 많은 책들이 있어 가끔씩 찾아보곤 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필자는 그간 꾀 많은 책들을 폐기처분하기도 하였는데 필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던 많은 책들을 종이 쓰레기로 고물상이나 헌책방에 넘겼던 적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직도 버릴 곳을 쉽게 찾지 못하여 집안에 그냥 보관 내지는 방치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뭔가 방법은 없을까?
애서가&장서가
광주에는 책을 좋아해서 독서와 더불어 일부러 책을 수집・보관해온 분들이 많다. 이른바 장서가들이다. 대학교수, 초중고교사, 일반시민 등 그들이 모은 수백, 수천, 수만 권의 책들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고 개인의 인생이 담긴 수집의 역사이자 기록이다. 그들이 모아 놓은 책들은 어쩌면 생활 속에 함께 공유해온 시대적, 문화적 지성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정말로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민들이 평생을 공들여 모은 이 소중한 도서들이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보관, 관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갈 곳을 잃고 있고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제는 버려도 되는 책들도 있겠지만, 그중에는 보존 가치가 높은 희귀본이나 더 많은 시민들이 이용할만한 가치를 지닌 책들도 많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 개인의 열정이 담긴 지식, 이 책 자산들이 더 크게 활용되지 못하고 한순간에 소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커다란 문화적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이 잠들어 있는 개인의 서재, 서가를 깨워 시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공의 자산으로 전환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는 광주이기에 더더욱 필요하다.
< 장서가 조대영 산수동 책창고 >
시민이 기증하고, 시민이 완성하는 ‘열린 라키비움’
필자는 그 해법으로 광주에서 처음으로 시작하는 ‘시민 주도형 열린 라키비움(Larchiveum)’ 모델을 제안한다. 라키비움이란 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복합 문화 공간을 의미한다. 단순히 책을 빌려보는 곳을 넘어, 기록물을 보존하고 전시하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거점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철학은 명확하다. “시민들이 기증하고 시민들이 완성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국공립 박물관이나 도서관들이 관 주도로 유물이나 도서를 구입하고 배치하는 하향식(Top-down) 구조였다면, 여기서 제시하는 라키비움은 시민들이 자신의 소중한 책들을 기꺼이 내어놓으며 스스로 공간을 채워나가는 상향식(Bottom-up) 모델이다.
장서가들의 서재를 통째로 옮겨온 듯한 ‘기증자의 방’을 만들고, 그 책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집되었는지, 소장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입힌다. 이렇게 구축된 공간은 단순한 정보 전달의 장을 넘어, 세대와 세대를 잇고 개인의 역사를 공공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유기적인 문화 자치 모델이 될 것이다.
디지털과 AI시대에 무슨 ‘책(BOOK)박물관이냐고 ? 여전히 유효하다’
AI가 모든 지식을 빠르게 요약해주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시민들이 평생 손때 묻혀 모은 '종이책'을 공공 자산화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 저장을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시민 주도형 열린 라키비움’이 AI 시대에 갖는 핵심 가치는 아래와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1. 데이터 너머의 ‘맥락(Context)’과 ‘안목’의 보존
AI는 파편화된 정보를 연결하지만, 시민들이 수십 년간 특정 분야의 책을 수집한 궤적은 한 인간의 철학과 안목이 투영된 하나의 '세계'이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개인의 취향과 수집의 맥락을 보존함으로써, 지식의 나열이 아닌 '지혜의 체계'를 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다.
2. 알고리즘에서 벗어난 ‘우연한 발견(Serendipity)’
AI는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지만, 라키비움의 서가는 뜻밖의 책을 마주하게 할 수도 있다. 시민들이 서가를 거닐며 전혀 예상치 못한 책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는 '아날로그적 탐색'은 창의성의 원천이 된다. 필터 버블(Filter Bubble)에 갇힌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환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책의 ‘물성’이 주는 정서적 연결과 치유
디지털 정보는 휘발성이 강하지만, 종이책은 무게와 질감, 향기, 그리고 이전 소유자의 메모가 담긴 물질성을 가진다. 고립되기 쉬운 AI 시대에, 누군가의 인생이 담긴 책을 만지는 경험은 세대 간의 정서적 연결을 돕는다. 라키비움은 차가운 데이터 센터가 아닌, 온기가 흐르는 '도시의 거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4. ‘문화 자치’를 통한 지역 공동체의 회복
시민들이 직접 기증하고 운영에 참여하는 모델은 시민을 단순한 서비스 수혜자에서 ‘문화 생산자’로 격상시키는 훌륭한 모델이다. "우리 동네의 북 박물관(라키비움)을 우리가 직접 채운다"는 자부심은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고 기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 강력한 도구가 됨은 물론이다.
5. 디지털 격차를 메우는 ‘지식의 민주화’
모든 것이 유료 구독 서비스와 디지털 기기로 전환되는 시대에, 누구나 무료로 고품질의 장서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은 필수적이다. 라키비움은 경제적·기술적 여건과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지식의 혜택을 누리는 '지식 복지의 보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북 박물관은 단순히 '오래된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흔적과 기억을 지키는 '인문학적 방주'라고 할 수 있다.
라키비움을 역동적인 공유의 장으로
광주가 지향하는 시민주도형 열린 라키비움은 정적인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박제된 유물처럼 책을 유리장 속에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그 속에서 영감을 얻는 ‘역동적인 공유공간’이어야 한다.
장서가들이 평생 모은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그 세계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고, 더 넓은 세상으로 공유하는 일은 우리 세대의 의무이기도 하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재가 모여 거대한 지혜의 숲을 이룰 때, 광주는 명실상부한 문화 중심도시로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첫째, 지속 가능한 기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개관 당시의 장서에 머물지 않고, 매년 시민들의 기증이 이어져 공간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살아있는 라키비움’을 지향해야 한다. 기증자에게는 명예로운 예우를 제공하고, 시민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만나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둘째, 통합적 가치 창출이다. 도서관으로서의 정보 제공, 기록관으로서의 사료 보존, 박물관으로서의 전시 기능이 한데 어우러질 때 시너지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광주 출신 문학가의 기증 도서를 읽으며(도서관), 그가 남긴 육필 원고를 확인하고(기록관),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소장품을 관람하는(박물관) 입체적인 경험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한강작가가 썼던 ‘소년이 온다’ 원고가 있다면...
셋째, 시민주도의 운영이다. 기증자들이 직접 도슨트가 되어 자신의 책을 설명하고, 책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모여 독서 토론과 기록물 관리 활동에 참여하는 자치적 운영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문화 자치’이자 ‘인문 도시’의 완성이다.
넷째, 적정한 수익모델 창출이 필요하다. 라키비움은 지자체 예산을 먹어야 사는 하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자체는 마중물만 보태면 된다. 잘만 연구한다면 충분히 자립모델을 구축할 수도 있다. 민간기업의 메세나 또는 개인 독지가의 출연으로 민간운영형 자립모델을 만들어 볼 수도 있고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익모델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과 지자체에 제안 한다
이제 시민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당신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시민의 도서실로 기꺼이 공유해 주시길. 그리고 지자체에게 제안한다. 지자체는 시민들의 그 소중한 마음들이 모일 수 있는 그릇을 정성껏 마련해주길 바란다.
시민이 주인이 되어 구축하는 이 ‘열린 라키비움’이 광주 동구의 새로운 랜드마크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적 성지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잠자고 있는 책장 속의 기록들이 깨어나 시민의 일상과 만날 때, 광주의 인문 정신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북(BOOK) 박물관 추진 세미나
연초부터 뜻있는 장서가들과 시민들이 동구인문학당에서 스스로 모였다. 몇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추진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마침내 전남광주 북(BOOK) 박물관 추진 시민모임을 만들었고 첫 세미나를 열기로 했다. 조선대학교(HK+사업단 지역인문학센터)도 뜻을 같이하여 기꺼이 동참하기로 했다.
오는 4월 15일(수) 오후 2시에 전일빌딩245 9층 대강당에서 열리는 ‘전남광주 북(BOOK)박물관 추진 세미나’에 장서가들이 모아 놓은 소중한 도서 기획전도 함께 열릴 계획이다.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통해 이 세미나에서 실천적인 추진방안들이 나왔으면 한다. 글을 맺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