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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잘려도 피묻은 태극기를 흔들었던 광주의 정신 '윤형숙'을 호명하다

임해리| |댓글 1 | 조회수 145

이번 3.1절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광주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한 인물, ‘남도의 유관순’이라 불린 윤형숙(1900~1950) 열사를 기억하고자 한다.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되기엔 그녀가 남긴 일생이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녀의 꺾이지 않는 기개는 훗날 5.18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오늘날 ‘빛고을 광주’의 민주주의를 꽃피운 소중한 시금석이 되었다.


수피아의 붉은 피, 왼팔로 피워낸 광복의 꽃


윤형숙은 7세 때 전라북도 남원 동북교회 윤성만 장로의 가정에서 자라며 복음을 접하였다. 이후 순천 선교부 프레스톤(John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 집으로 가 순천 매산 성서학원(지금의 순천 매산중학교)을 수료하였다.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1900~1950) >


그리고 1918년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0세 되던 해, 수피아여학교 2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1일 만세 운동 후 광주에서 전남 광주수피아여학교(광주 최초의 여학교,현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광주 애국청년들과 기독교인들이 모여 광주의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거사 일을 광주 천변에 서는 부동 장날인 3월 10일 오후 2시로 정하고 만세 시위가 열릴 광주 부동교 아래 장터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밤새 만들어 온 태극기를 꺼내 흔들고 사람들과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일대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서문통과 본정통을 거쳐 오후 5시경 우체국 앞에 도착하였다.


시위대가 본정통을 돌아 광주경찰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일본군 헌병들은 군도를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군중은 경찰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제는 총검을 휘둘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물들었다.


윤형숙은 일본 헌병의 칼날이 그의 왼팔을 내리쳤을 때, 태극기와 함께 왼팔이 땅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윤형숙은 쓰러지지 않았고 남은 오른팔로 피로 물든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처절하고도 숭고한 모습에 일제조차 당황했고,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졌다.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윤혈녀'라 불린 여인, 고난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발걸음


1919년 9월 18일 『독립신문』에 기월(其月)이 쓴 「피눈물」 단편소설 일부 기사를 살펴보면, '십칠팔 세나 되었을 여학생이 왼편 팔에서 흐르는 피를 공중에 내어 뿌리며 태극기를 들어 대한 독립만세를 부른다.' 라고 묘사하였다.


일제는 윤형숙을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생도 윤혈녀(尹血女)로 기록하였다. 그 후 윤형숙은 팔이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른쪽 눈도 부상을 당해 실명하게 되었다.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지만 부상당해 치료를 받느라고 재판에 나오지 못한 상태로 징역 4개월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징역형을 선고받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녀의 삶은 멈추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팔과 눈을 내주었듯, 해방된 조국을 위해서는 교육자이자 전도사로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던진 것이었다. 그는 군부대 병원과 같은 곳에서 치료를 받으며 1923년까지 4년 동안 격리되어 생활하다가 함경남도 원산에 가서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쯤에는 고창읍 교회에서 유치원과 부녀야학회를 설치해 학생을 가르쳤고, 1933년경에는 전주 성경학원에서 기숙사사감을 하였다. 1939년경 그는 고향 여수에서 봉산학원 교사로 재직하며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윤형숙은 1963년 10월 전국 순국 반공청년운동자 합동 위령제에서 “1945년 8월 15일해방 이후 조국의 자주통일을 위한 청년운동에 앞장서 참가하여 반공전선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반공인사로 표창장을 받았다. 그 후 1950년 9.28 수복 당시 그는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붙들려서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총살당했다.


2004년에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 수피아 여고 대강당 앞에 세워진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 동상,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23명의 명단과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 임영열 >


그가 묻힌 고향마을 묘비에 새겨진 비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이 묘비명은 1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현실 속에서 구현되었다. 2024년 1월 5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거리로 뛰쳐나와 매서운 추위 때문에 은박담요를 겹겹이 둘러싸고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있는 그 모습이 마치 초콜릿 같다고 해서 ‘남태령 키세스 군단’이라 불리던 20대 여성들.


그들의 얼굴에서 스무 살 윤형숙의 얼굴을 떠올린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고귀한 정신의 빛으로 숙성되는 것이다.


1 댓글
이영환 03.05 02:29  
일반시민의 위대함을 널리 만방에 퍼뜨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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