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줄다리기는 어떻게 사라져 갔는가?
< 기지시 줄다리기 사진 출저:기지시줄다리기축제 홈페이지 >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의 줄다리기가 어떻게 전승되고 있었는지, 이 시기에 발행된 신문과 잡지를 통해 그 실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세시풍속을 다룬 기사는 총 446건에 이르며, 이 가운데 ‘설’에 관한 기사가 98건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설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을 ‘정월 세시풍속’으로 간주할 경우, 관련 기사는 총 135건에 달하여 다른 세시풍속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당시 마을과 마을이 연계된 지역 단위의 대규모 줄다리기가 어떠한 방식으로 연행되었는지를 일정 부분 파악할 수 있다.
전라남도 광주군내에서는 구력 정월 보름에 어린 아희들의 작난으로부터 시작된 줄이 차차 커져서 수긔옥뎡(수 奇屋町)과 루문리(樓門里)로 나누워서 줄다리기를 하엿는대 무려 만여명에 달한 구경군은 인산인해를 일우엇고 이십사일 하오 다섯시부터 줄을 다리기 시작하야 잇흔날 새벽까지 승부를 내이지 못하고 결국 석젼 한바탕으로 홀녓든 팔을 뽐내여 보고 갈니여 갓든 군중은 조반 후부터 다시 모혀 오후 네시까지 당기인 것이 역시 승부는 업섯고 또한 석젼이 일어나서 다수한 부상자까지 잇섯다더라.(<동아일보> 1921. 2. 28 蟹戱끗헤 石戰-마츰내 석전으로 사람까지 닷치어-)
경기도 이천읍내에서는 지난 십팔일에 근년에 처음 보는 큰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부근의 여섯 고을이 연합하여 판을 짜가지고 다리었으며, 당일 회장에는 관람자가 삼만여 명에 달하였고, 줄다리기는 사람이 육천여명에 달하여 실로 공전절후의 대장관을 이루었으며 원래 대규모 운동임으로 중상자가 구 명이오 즉사자가 삼 명에 달하여 일시는 대소동까지도 일어났었는데 엇지하였던지 줄다리기는 우리 조선의 고유한 운동으로 석전의 다음 가는 것이라 각 편에서는 용기가 충전할듯하였다. 그런데 이번 줄다리기에 사용한 줄은 놀라지 말지어다. 길이가 이천 오백 척이오, 굵기가 직경 두자나 되야 참으로 큰 줄이었으며 몇일 전부터 회장에서는 수십명 준비위원이 잠도 못자고 줄을 꼬으며 모든 설비를 한 것이라더라.(<동아일보> 1921. 3. 22.)
부산 시민의 줄다리기 대회는 십이일 오후 한 시부터 시작하였는데 회장에 나온 사람이 십만 명에 달하여 비상한 성황을 이루었고, 십삼일 오후 열 시까지 계속할 터인데, 각 지방으로부터 다수한 응원자와 관람자가 모여드는 중인 고로 십삼일에는 십오륙 만에 이르리라더라.(<동아일보>, 1922, 2. 13)
이상의 자료는 1921년과 1922년에 보도된 <동아일보>기사로, 전라도 광주, 경기도 이천, 부산 일대에서 대규모 줄다리기가 활발하게 연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줄다리기는 음력 정월 보름 무렵에 개최되었으며, 단일 마을 차원을 넘어 여러 마을 단위의 사람들이 참여한 점에서 그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광주 지역에서는 줄다리기 도중 만여 명의 구경꾼이 몰렸고, 승부가 쉽게 나지 않자 줄다리기와 석전(돌싸움)이 동시에 벌어져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경기도 이천읍에서 열린 줄다리기는 그 규모가 더욱 커 삼만 명의 관람객이 모였고, 줄의 길이는 이천오백 척에 달했으며 중상자 아홉 명과 사망자 세 명이 발생하였다고 전해진다. 부산의 경우에는 줄다리기를 ‘대회’의 형식으로 개최하여 십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회장에 집결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각 지역에서 전투적 성격과 강한 경쟁심을 수반한 대규모 집단놀이로서의 줄다리기가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일제의 문화적 강탈 속에서 민족적 전통을 계승하거나 고수하려는 의지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전통문화에 대해 일제가 일정 부분 정치적 협력과 타협의 태도를 취한 결과로 이해할 여지도 있다.
한편 집단놀이에 대한 통제는 191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탄압은 한일병합 이후 일제의 경찰 취체(取締)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시각에서 비합리적이거나 야만적이라고 인식된 ‘돌싸움’뿐만 아니라, 축제의 과잉으로 간주된 ‘농악’, 집단적 성격이 강한 ‘줄다리기’, ‘횃불싸움’, ‘연날리기’ 등도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집단놀이를 억압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능한 법적 근거는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범죄즉결령’이었다. 이 법령의 시행세칙인 ‘경찰범처벌규칙’에 따라 노래와 춤, 농악놀이 등 전통적 민속놀이가 주요 통제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 초기부터 줄다리기와 같이 다수가 모이는 행사는 일정 수준의 통제를 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1930년대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일제의 통제 속에서도 크고 작은 줄다리기 행사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를 둘러싼 허가와 금지, 찬반 논의가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줄다리기는 1910년대 당국의 금지로 일시적으로 축소되었다가,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가 시작되면서 민중 집회가 부분적으로 허용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다시 대규모로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살핀 광주, 이천, 부산의 사례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줄다리기가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를 기준으로 볼 때,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줄다리기 개최 빈도와 관련 보도는 증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부 지역에서 줄다리기가 금지되기 시작한다. 금지 사유로는 대중 집합에 대한 우려, 국상 중이라는 이유, 상부의 불허 방침, 혹은 폭동 발생 가능성 등이 제시되었다. 1927년을 기점으로 1~2개 지역에서 줄다리기 금지 사례가 나타나며, 1930년대에 들어서면 전국적인 차원의 줄다리기 기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1931년부터 1936년까지 간헐적으로 관련 기사가 등장하나, 1937년 이후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감소에는 식민 당국의 민속 통제, 1930년대 전후의 경제 대공황, 전시체제로의 전환, 그리고 근대주의적 시각에서 전통을 부정·폄하한 지식인 담론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대규모 지역 단위의 줄다리기는 강제적이거나 자연스럽게 중단되었으나,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는 일제강점기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을 단위 줄다리기 역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는 과정을 거쳤고,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다시 소멸의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호남 지역 일대에서는 마을 단위 줄다리기가 일정 부분 계승되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 말기에 성행하였던 줄다리기는 일제강점기의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중단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시대에 부합하는 문화적 의미를 부여받고,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를 토대로 새롭게 재현된 사례도 확인된다. 영산 줄다리기, 기지시 줄다리기, 의령 큰줄댕기기, 광주 칠석 고싸움 등은 축제의 형태로 확대·발전하여 줄다리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민속문화가 연행되고 있으며, 현대화된 경연과 놀이 요소가 결합되어 축제성이 지속되고 있다. 이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제도적·행정적·경제적 기반이 함께 마련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과천 게줄다리기, 화양 줄다리기, 장흥 보름줄다리기, 충주 목계줄다리기 등은 공식적인 재현을 통해 복원을 시도하였으나, 전승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다시 중단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과천 게줄다리기는 1915년까지 관문교를 중심으로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지역 놀이로 전승되었으나, 오랜 공백 이후 1992년 과천시민의 날에 재현되었고 다시 중단되었다. 화양 줄다리기는 일제강점기 중단 이후 해방 뒤 재개되었다가 1968년 중지, 1983년 복원, 다시 중단되는 과정을 겪었다. 장흥 보름줄다리기 역시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연을 위해 재현되었으나 이후 지속적인 전승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들 사례의 중단 원인으로는 대규모 행사에 따른 비용 부담, 볏짚 확보의 어려움, 도시화로 인한 전승 환경의 약화 등이 지적된다.
이처럼 일부 줄다리기가 중단된 것은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제도적·행정적·경제적 기반의 미비와 더불어, 사회 변화에 따른 민속문화의 유용성에 대한 회의적 인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아울러 도작문화가 생업의 중심이던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격히 전환되면서 농경 세시성이 약화된 점도 중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줄다리기의 축소와 소멸, 중단과 복원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적 변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복원을 통해 계승의 연결고리를 마련하고 있으며, 또 다른 지역에서는 재현을 시도했다가 다시 중단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줄다리기에 투영된 시대성과 문화성이 지역공동체라는 ‘지역성’과 결합하며 새롭게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참고자료>
* 공제욱, 「일제의 민속통제와 집단놀이의 쇠퇴:줄다리기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제95집, 한국사회사학회, 2012.
* ‘검찰범처벌규칙’은 총 8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50조에는 ‘돌던지기 같은 위험한 놀이를 하거나 시키는 자, 또는 길거리에서 공기총류나 활을 갖고 놀거나 놀게 시키는 자’를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돌팔매싸움을 명문으로 규정하여 처벌하였던 것이다. 또 제37조에는 ‘밤에 함부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자, 기타 행위를 하는 자’ 제49조에는 전선 근방에서 연을 올려 전신을 방해하는 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