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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과 문헌으로 본 줄다리기의 전통

서해숙| |댓글 0 | 조회수 40

전북 고창군 상부마을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벼농사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한 우리의 전형적인 민속문화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줄다리기라는 명칭은 지역의 언어적, 놀이적 특색에 따라서 ‘줄당기기’, ‘줄땡기기’, ‘줄댕기기’, ‘줄쌈’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줄다리기’ 명칭이 고유명사로 통용되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보편화된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나 줄다리기에 대해 언급한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기록한 이들에 따라 각기 달리 표현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줄다리기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그 명확한 역사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나마 문헌에 언급된 것은 조선 후기의 단편적인 세시풍속의 기록이나 문인들에 의해 당대의 풍속을 읊은 한시에 부분적으로 소개되는 정도이다. 그 이전의 문헌에는 줄다리기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상황이다.


먼저 줄다리기에 대해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조선 후기 문헌을 살펴보면, 줄다리기를 ‘綯索’, ‘葛戰’, ‘照里之戱’(홍석모, 『東國歲時記』), ‘索戱’(이규경, 五洲衍文長箋散稿), ‘索戰’(홍석모, 都下歲時風俗詩, 조면호, 玉垂集), ‘曳索’(이학규, 金官紀俗詩), ‘挈河’(유만공, 세시풍속), 蟹索(신종묵, 愚山晩稿), ‘繂曳’(황현, 상원잡영)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索戰’, ‘網引’(村山智順, 조선의 향토오락), ‘引索戱’(최영년, 「속악유희」, 海東竹枝), ‘引索’(최남선, 조선상식)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기록자에 따라 줄다리기의 명칭이 저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의 향토오락에 기록된 ‘索戰’, ‘網引’ 두 가지 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줄다리기 방식의 차이 때문에 달리 표기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으나,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줄다리기의 다양한 연행방식, 놀이방식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명칭에 담겨진 뜻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줄다리기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난 것에 대해 기록자가 줄다리기의 무엇을, 어디에 역점을 두고서 기록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말 그대로 ‘줄’을 의미하는 綯, 繂, 網과 ‘당기거나 이끌다’의 뜻을 갖는 索, 曳, 挈, 引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줄다리기의 재료인 볏짚을 꼬아 만든 줄과 줄다리기 놀이의 핵심인 양편으로 나누어서 줄을 끌고 당기는 일련의 상황을 고려해서 적기(摘記)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영남지역에서는 줄의 재료로 볏짚 외에 칡[葛] 줄기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여 줄다리기를 ‘葛戰’이라 쓰는 경우도 보인다. 덧붙여 칡을 줄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줄을 단단하고 크게 만들기 위함이며, 나아가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줄다리기에 참여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게 한다. 곧 영남지역에서 대규모의 형태로 연행한 줄다리기를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살피면 관찰자의 시각이 아닌 지역에 따라서 줄다리기의 연행상황과 참여자들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이칭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곧 지역에 따라 줄다리기의 놀이방식과 경쟁방식 그리고 놀이 참여자들의 분위기와 흥겨움 등에 따라 명칭이 달리 붙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남 영광군 우평마을 줄다리기


한편, 조선 후기 그 당시의 줄다리기 연행 모습은 몇몇 문헌에 한시 형태로 기록되어 전한다. 구체적으로 헌종 9년 1843년에 기록한 유만공의 세시풍요 가운데 줄다리기를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시풍요는 유만공이 서울 근교에 살면서 당시 전승되고 있는 세시풍속을 한시로 엮은 것이다.


塡街石戰太橫行  거리 가득 돌싸움이 너무나 지나치니 

動地號呼勢可驚  지축이 울리도록 소리치는 기세 놀랍네 

何似鄕村今夜月  어찌 같으냐 달 밝은 오늘 밤 시골에서

半空遙聞挈河聲  하늘에 울리도록 줄다리기하는 소리와 

[挽索戱曰挈河]   **줄 잡아당기는 놀이를 ‘설하’라고 한다.


위의 내용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돌싸움[石戰]하였는데, 그들의 노는 모습이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우렁찬 기세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돌싸움은 달 밝은 정월 보름날 저녁에 시골 마을에서의 줄다리기 함성에 비할 바가 아닐 만큼, 오히려 줄다리기가 대단하였음을 반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석전(石戰)과 대비하여 줄다리기의 분위기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줄다리기를 ‘挽索戱’라 적기한 것을 보면, 줄을 당기는 일련의 놀이과정에서 얻어지는 흥겨움과 즐거움의 정서를 ‘戱’와 같은 명칭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황현이 기록한 「상원잡영」은 梅泉集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가 살았던 전라북도 남원지역의 정월 대보름 풍속을 소재로 지은 10수의 기속시(記俗詩)이다. 여기에 수록된 시 가운데 줄다리기[繂曳]에 대한 묘사와 함께 개인의 심회를 담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繂場如槃百步平  평평한 줄다리기 마당 백보나 넓고 

人人醉薰十步生  사람마다 술냄새 십보마다 풍기네 

鼓聲未絶呼聲動  북소리 끝나기도 전에 외치는 소리 

從此擊鼓無鼓聲  북은 치지만 그 소리 들리지 않네

千趾錯植項齊彎  발을 엇바꿔 버티고 고개를 젖히니 

仰面不見天月明  밝은 보름달은 눈에 들어오지 않네 

黑塵蓊勃出鼻底  검은 콧김 뿌옇게 코밑에서 나오고

剗平凍地翻成坑  평평한 언 땅 발로 비벼 구덩이 만들었네 

當下若將決生死  당장에 사생결단 끝장을 내려는 듯 

傍觀未暇論輸贏  꾼들 승부를 논할 겨를이 없네 

忽如崩山笑不休  산 무너지듯 쓰러지자 웃음이 이어지고

轍亂旗摩曳殘兵  수레와 깃발 꺽인 패잔병처럼 끌려가네 

汗袍凄澟夜向闌  밤이 깊을수록 땀에 젖은 옷 차가워지고 

抹帕飄拂風怒鳴  거센 바람 불어오니 머리띠 휘날리네 

村篘麤瀉薄薄醪  묽은 막걸리 용수로 대충 걸러내어 

無揀勝負輪深觥  승자와 패자 구별없이 술잔을 돌리네

生老太平今百年  태평을 누리면서 살아온 백년 세월 

此等俗戱皆人情  이러한 풍속놀이 인정에서 나왔네 

嗟哉汝曹眼力短  애닯도다! 안목 짧은 그대들이여

試向東海看饞鯨  동해의 탐욕스런 고래를 보게


위의 기속시는 조선 말기 전북 남원의 어느 마을에서 열린 줄다리기를 한 폭의 그림처럼 혹은 박진감 넘치는 짧은 영상을 보는 듯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음력 정월 보름날 달이 떠오를 무렵에 줄다리기가 시작되었고, 줄의 길이가 백보 가량이며, 풍물 소리가 끊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흥겹게 술을 마시다가 북소리에 맞추어서 줄을 당기기 시작하는데, 이기기 위해 검은 콧김을 뿌옇게 내뿜고 겨울에 언 땅을 발로 비벼서 구덩이를 팔만큼 끝장을 낼 듯이 덤벼들어 승부를 가린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은 승부를 논할 겨를 없이 웃음을 연발하면서 승자와 패자가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인다. 저자가 마지막에 이러한 풍속이 인정(人情)에서 나왔음을 언급하였듯이, 전승 주체자인 마을 혹은 지역 주민들에게 있어 줄다리기는 인간적인 화해와 풍농에 대한 기원과 그에 대한 유희적 미의식을 표출하는 매개이고 대상이었던 것이다. 


전북 부안군 운호마을 줄다리기


다음은 최영년이 일제강점기에 어느 지역에서 연행되고 있는 줄다리기를 ‘引索戱’라 하여 그 광경을 시적으로 표현한 글로, 1921년 역대의 기문이사와 세시풍속을 칠언절구, 칠언율시로 읊은 해동죽지의 중편인 「속악유희」에 실려 있다.


천룡(天龍)의 맞대인 머리에 오공(蜈蚣)의 발

일만의 입에서 내는 큰소리에 땅도 움직움직한다

반걸음에 풍년 징조 빼앗길세라

새로 시집 온 각시도 나와서 돕는다


위의 글 역시 앞서 언급한 황현의 글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이다. 줄다리기의 줄이 용의 머리, 지네의 발과 같이 생겼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줄다리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만여 명에 이른 것을 보면 대단히 큰 규모의 줄다리기였음을 짐작게 한다.


또한 줄머리는 용이며 수신(水神)으로 신격화 되어 줄다리기의 승패가 곧 풍년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인 최영년이 경기도 광주 출생임을 전제하고 보면 위의 줄다리기는 경기도 일대에 전승되고 있는 줄다리기의 연행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묘사된 줄이 오늘날의 ‘게줄다리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경기도 과천에서 연행되었던 ‘과천 게줄다리기’이거나 혹은 경기도 수원 남문 밖에서 거행되었던 ‘유천 줄다리기’가 아닐까 짐작된다. 


줄다리기를 언급함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조선의 향토오락은 1936년 각 도지사에게 조회하여 당시 전국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향토오락을 조사, 정리한 자료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줄다리기 분포지역은 총 161지역이다.


각 지역의 줄다리기 시행 여부만을 간략히 기술하는 수준이고, 당시의 불운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일본인에 의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을 전제한다면 자료로서의 그 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료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많으나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기록으로는 이 자료만큼 전국을 대상으로 한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또한 당대의 민속문화 현상은 미비하나마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서 많이 인용하는 문헌이다.


이 자료에는 줄다리기를 ‘索戰’, ‘網引’ 등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戱’로서의 줄다리기와 ‘戰’으로서의 줄다리기의 양상을 복합적으로 유추할 뿐이다. 이 문헌에는 전북의 임실, 정읍, 고창, 김제 등지의 줄다리기의 경기방식과 승패 이후 줄의 처리와 인식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줄다리기의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읍과 고창 등지에서 줄다리기가 끝난 후에 줄을 나무에 감아두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지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오늘날 남겨진 단편적인 문헌과 명칭을 토대로 조선 후기 줄다리기 연행 분위기 등을 살펴본 결과, 오늘날 전승되는 줄다리기가 이미 이 시대부터 정형화된 형태를 갖추고서 정착, 전승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줄다리기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戱’와 ‘戰’는 줄을 당기는 모습과 분위기가 유희적인가 혹은 쟁투적인 것인가에 따라 명칭을 달리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 지역에 전승되는 줄다리기의 양상과 이를 관찰하는 이들의 인식에 의해 달리 붙여진 명칭이지만 ‘戱’와 ‘戰’를 통해 줄다리기가 갖는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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