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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와 철과 유리의 마천루

박호재| |댓글 0 | 조회수 77

독일 데사우에 있는 바우하우스 교사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근대건축이 현대건축으로 넘어오는 브릿지 역할을 했던 건축학교다.


1907년 뮌헨에서 결성된 ‘독일 공작연맹’ 이라는 공예운동 그룹에서 활동했던 건축가들이 바우하우스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건축교육이 핵심 키워드였지만 화가, 디자이너, 조형예술가들이 교수로 참여했으며, 기술과 수공업, 학술이 융복합된 종합예술학교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라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인 그로피우스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교수로 끌어들였다.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클레 등 화가들도 교수로 참여했다. 또한 이들은 당대의 스타일리트이자 전위 예술가들이었기에 바우하우스 정신이 어디에 근거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파구스 구두공장'


바우하우스 교육은 구래의 양식과 역사주의에서 벗어나 기능주의라는 원칙 아래 단순하고 합리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다. 또한 예술과 기술, 장식을 배제한 생활을 위한 디자인의 결합을 통해 건축행위의 실용성과 경제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교육철학에 따라 간결한 직선과 평평한 면으로 구성되는 입체미학이 디자인의  중심 개념이 됐으며  공장생산이 기능한 철재와 유리 같은 현대 산업 소재가 많이 사용되었다.


양식과 역사주의를 배척하는 바우하우스의 이같은 무국적 건축정신은 제국주의 건축양식을 선호했던 히틀러의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치정권은 결국 학교를 폐쇄했고 이후 교수로 참여했던 다수의 건축가들은 해외로 도피했다.


바우하우스에 참여했던 상당수의 예술가들이 유대계였다는 점도 나치정권 박해의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개개인으로선 불운한 역경이었지만, 히틀러의 박해는 바우하우스 정신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됐다. 특히 미국으로 망명한 건축가들의 활동은 현대 건축문화사에서 눈부신 업적으로 남아있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


바우하우스 초대 교장인 그로피우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현대건축교육의 근간을 만들고 성장에 기여했다. 바우하우스 마지막 교장을 지낸 미스 반데어 로에는 일리노이 공과대학 학장을 지내며 ‘백색주의’라 일컬어진 현대 미니멀리즘 건축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바우하우스에서 가구 디자인을 가르쳤던 마르셀 브로이어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바우하우스 디자인 정신을 다양한 분야에서 전파했다.


미스 반데어 로에의 '시그램빌딩'


간결 명료한 입체미, 기능주의와 경계 없는 국제주의를 추구한 이들의 건축정신은 미국 대도시 고층빌딩 건축의 원형질이 됐다.  또한 당시 세계제일의 부를 축적한 미국의 산업자본은 이들의 활동에 기름을 부어주는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미국 자본주의 고도성장의 상징이었던 ‘철과 유리의 마천루’가 히틀러가 추방한 바우하우스 망명 건축가들에 의해 성취됐다는 점은 건축문화사의 하나의 아이러니로 기록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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