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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늦가을 담양, 잊힌 항일 역사 속으로

이진| |댓글 0 | 조회수 48

보통 담양여행은 죽녹원과 관방제림 그리고 메타세쿼이야 가로길, 소쇄원과 가사문화권, 창평 슬로시티와 장터 등이 떠오른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떡갈비, 담양식 돼지갈비, 대통밥, 창평국밥 등이 유명하다. 등산 코스로는 추월산, 금성산성, 병풍산이 있다. 요즈음은 베이커리 카페와 다양한 음식이 담양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가까운 담양에 자주 간다. 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늦가을의 정취가 짙게 드리운 담양 땅, 다른 느낌으로 그 땅을 밟았다. 오늘은 단지 풍경이나 감상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여행이 아니었다. 담양 땅에 새겨진 피와 눈물의 흔적, 역사의 굽이진 페이지를 직접 마주하고 기억하려는 여정이었다.


의병대장 녹천 고광순 사적비 / 용흥사 사천왕문밖 300년된 보호수 / 고하 송진우 기념관


발길이 처음 닿은 곳은 ‘녹천 고광순 기념관’이었다.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의병장은 임진왜란 때 고경명 의병장의 12대손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기백을 물려받아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병장이 됐다. 호남 최초 의병인 기우만(奇宇萬, 1846~1916)과 함께 남원성 장악 시도 후 지리산에서 항전했다. 피아골 연곡사에서 순국했다. 일제는 연곡사뿐 아니라 근처 사찰까지 모조리 태워버렸다. 일제는 장군의  정신까지 제거하려고 했지만, 그의 뜨거운 정신은 불태워진 연곡사의 재 속에서도 숨 쉬고 있었다.


‘용흥사’로 향했다. 한때 영조의 모친과 인연으로 면세 사찰이 될 만큼 큰 절이었다. 구한말, 이곳은 호남 의병의 근거지가 됐다. 일제는 용흥사가 의병을 품었다는 이유로 48동의 가람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모진 세월 끝에 겨우 복원되었던 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국군의 총탄에 다시 전소되는 이중의 비극을 겪었다. 지금 새롭게 세워진 가람은 과거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 터는 겹겹이 쌓인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었다.


‘고하 송진우 기념관’이다. 담양 의병의 뜨거운 피는 해방정국에도 큰 흐름으로 이어졌다. 송진우(宋鎭禹, 1890~1945)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 했던 독립운동가다. 일제강점기 2차례 투옥됐다. 어린 시절 기삼연(奇參衍, 1851~1908) 의병장에게 10년 동안 학문과 성리학을 배웠다. 기장군은 1908년 광주천 백사장에서 일제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는 스승의 소식을 듣고 항일의 의지를 더 키웠으리라. 3.1운동 민족 대표, 동아일보 창간, 그리고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주도 등. 스승은 뜻은 서울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일제 패망 후 한국민주당의 설립자로서 우익진영의 대표자였다. 그러나 그는 첫 정치테러의 희생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이 얼마나 격동적인 시대를 관통했는지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애국지사 김제중 독립운동 기념 공훈비 /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지석


또 다른 독립운동가인 ‘애국지사 김제중 독립운동 기념 공훈비’ 앞에서는 더 숙연해졌다. 김제중(金濟中, 1893~1950)은 향리였다. 공무원 신분으로 3.1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대동단 조직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했다. 일제에 체포됐을 때 "이 돈은 훔친 돈"이라고 버텼다. 동지들을 살려낸 의지는 ‘간도 15만원 사건의 전홍섭’을 떠올리게 했다. 그를 괘씸하게 여긴 일제는 10년 선고했고 8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의리와 기개'라는 단어가 김제중이라는 이름 석 자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미리 알지 못했던 표지석 하나가 발길을 붙잡았다. 창평시장 사거리에서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표지석을 발견했다. ‘1894년 12월 8일, 이곳에서 접주 한충삼이 총살되고 백처사 등이 체포되었다’는 짧은 글귀. 이 조용한 시장의 땅속에도 민초들의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외침이 잠들어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담양의 하루는 역사 교과서의 한 줄이 아니라, 살아 있는 피와 땀의 현장이었다. 우리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 우리는 때로 잊고 살아간다. 오늘 마주한 고광순과 기우만의 불타는 충의, 용흥사에 새겨진 수난, 송진우와 김제중의 꺾이지 않는 기개, 그리고 창평사거리의 동학혁명의 피가 우리에게 외친다.


"알지 못하고 잊힌 역사, 꼭 알고 기억해야 할 세계인 것이 분명하다"

이 기록은 단순히 답사의 흔적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우리의 다짐이다. 늦가을 담양의 흙을 털어내며, 마음속에 뜨거운 역사의 씨앗 하나를 심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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