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화 러너’ 심진석의 이야기...“핑계는 사치”
11월 하순의 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러닝 관련 유튜브 영상을 자주 보게 되었다. 훈련법, 페이스 관리, 호흡, 영양까지 알고 싶은 게 많아져서이다. 그러다 알고리즘이 반복해서 추천한 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안전화 신고 매일 하프코스를 뛰는 비계공 러너.’
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회수를 노린 영상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무거운 안전화를 신고 매일 하프코스를 뛴다는 설정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추천에 뜨는 영상을 결국 클릭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감동적인 장면으로 남게 되었다.
영상의 주인공은 심진석(29) 씨.
첫 화면부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일반적인 러너의 차림이 아니었다. 건설 현장 작업복에 안전화, 안전모, 그리고 물통이 들어 있는 가방까지. 그는 이런 복장으로 지하철 구간을 제외한 모든 출퇴근 거리를 달렸다. 출근도 러닝, 퇴근도 러닝이었다. 왕복 약 8km 거리를 매일 훈련 코스로 삼았다.
그의 손목에는 요즘 러너들에게 거의 필수품처럼 여겨지는 스마트 워치도 없었다. 심박수, 페이스, GPS가 표시되는 고급 장비 대신, 시간만 나오는 카시오 전자시계 하나가 전부였다. 기록이나 장비보다 꾸준함이 더 중요하다는 듯한 순수한 모습이었다.
유튜브 <낭만러너 심진석> 캡처
고된 일터 속에서 피어난 ‘낭만 러너’
심진석 씨의 직업은 비계공이다. 고층 건물 외벽에 비계를 설치하고 해체하는 기술자다. 건설 현장에서 일해본 사람들은 이 일을 “노가다 중의 상 노가다”라고 부른다. 체력 소모가 극심하고, 위험도 크다. 그런데 그는 그 고된 노동을 마친 뒤에도 달렸다. 일터로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자체가 그의 훈련장인 셈이다. 이렇게 쌓아 올린 체력은 곧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다. 전문 선수도 아닌 그가, 올해 3월부터 거의 매주 대회에 출전하며 27연속 우승을 기록했다. 42.195km 풀코스도 2시간 31분 15초에 주파했다. 아마추어 러너들 사이에서 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서브3’가 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기록이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영상은 일주일 만에 조회 수 200만 회를 넘겼고, 이후 260만 회를 돌파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댓글이었다. 약 1만 5천 개가 넘는 댓글에는 단순한 응원을 넘어선 ‘참회록’이었다.
“러닝화 몇 그램, 러닝벨트 무게, 미세먼지 같은 핑계 속에서 살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몸과 심장을 단련해야 하는데, 나는 신발과 옷만 단련했다.”
누군가는 그에게 멋진 양복을 지어주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치과 치료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댓글이었다. "이 순수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는지 대한민국 러너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는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그의 진정성이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음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마라톤의 본질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것”
심진석 씨는 이제 러너들 사이에서 이미 ‘스타’가 되었다. 메이저 신문과 공중파 방송은 물론, 인기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도 출연하며 대중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유명세는 자연스럽게 광고, 협찬 등 자본주의의 유혹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어졌다.
최근 그는 비계공 계약이 끝난 후 전국 마라톤 협회에서 일하며 훈련을 병행하고 있다. 당장의 목표는 내년 초 대회에서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것으로 세웠다. 해외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고 싶다는 희망도 피력했다. 그는 자신의 마라톤이 “100세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레이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 지점까지 가는 것이 마라톤의 본질”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유튜브 <낭만러너 심진석> 캡처
2018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일본의 고등학교 사무직원이자 동호회 마라토너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최강의 시민 러너가 세계에 충격을 줬다”고 보도했다. ‘낭만 러너’ 심진석 씨도 '최강의 시민 러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러닝 인구 1,000만 명 시대, 우리는 최첨단 장비와 정확한 데이터를 좇는다. 하지만 심진석 씨의 달리기는 그 모든 조건을 내려놓고 출발했다. 안전화, 작업복, 낡은 전자시계. 단순한 장비만으로도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달렸다.
심 씨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뛰어난 기록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을 핑계 삼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고된 과정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가 잊고 지낸 ‘열정과 순수함의 가치’를 일깨워줬기 때문이었다.
심진석 씨의 달리기가 앞으로도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의 유혹에 좌초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장비가 아니라 태도로, 기록이 아니라 마음으로, 마라톤에 ‘낭만’이라는 단어를 붙여줬던 그의 레이스를 조용히 응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