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만들어진 문병란의 시 ‘첫눈’
어제 아침,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쌀쌀한 날씨를 보이더니 일기예보에서는 광주와 전남 서해안에 오늘 첫눈이 올 수 있다고 한다.
첫눈은 그해 가을 이후 처음으로 내린 눈을 말한다. 만약 여름에 눈이 내렸다면 그것은 '기상이변'이지 첫눈은 아니다. 1938년 지금의 상무지구 치평동에 광주비행장이 개설되면서 비행장 남쪽에 측후소를 설치한 이후, 광주지역 첫눈 평년 일은 11월 25일이니 이즈음에 첫눈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첫눈이 몇 cm 이상 내려야 한다는 기준은 없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눈이 내려도 기상관측소에서 보지 못하면 공식적인 첫눈이 아니다. 그러니까 충장로에 눈발이 날리고 무등산 정상이 하얗게 눈에 덮여도 운암동의 기상관측소에 눈이 오지 않으면 기상청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첫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함박눈 외에 진눈깨비나 싸라기도 적설량에 상관없이 첫눈으로 인정된다.
사람들이 첫눈에 마음 설레고 들뜬 기분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을 같이 보면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거나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꽃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첫눈 오는 날 고백하면 대부분 성공하는데, 실제로 첫눈이 내리는 날 숨겨뒀던 마음을 고백하는 일이 평일에 비해서 더 높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첫눈을 우연히 함께 맞는 운명적이고 낭만적 사랑을 바라는 심리가 은연중에 작용해서 이맘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이 오는 날, 광주사람들은 우다방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충장로에서 첫눈이 오는 날의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 문병란 시집 땅의 연가 >
이런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가 있다. 광주에서 교육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한 문병란의 ‘첫눈’이다
첫눈 - 문병란
오늘의 싸늘함이
코끝에 향긋하니 꽃 피는 날
포장마차 집에서 소주 석 잔을 비울 때
아, 첫눈이다, 기쁠 건 없지만
사내들은 모두 예수같이 보이고
여자들은 모두 천사같이 보인다
아무라도 허물없이 사랑하고 싶은 날
이런 날은 돌멩이라도 사랑할 수 있어라
여보게 이런 밤 우리도
소주 한 병 비우고 조금 취해
모닥불가에 앉아 손 부비며
쓸쓸하게 사랑하는 법이나 배울까?
허물없이 정드는 법이나 배울까?
사랑이 무어나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대답할까?
천원짜리 한 장을 마지막 쓴 밤에
슬프다 슬프다 작게 외치리
첫눈이 보시락거리며
내 두금 더 는 주름 위에
입술 부비며 젖어내릴 때 여자여,
오늘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같이
굴뚝 타고 모르게 그대 찾아가리
첫눈이다! 첫눈이다! 이 밤에 그대 곁에 누워
허물없이 정이 드리, 그냥 기대어
타오르다 무너지는 노을이 되리, 여자여
‘첫눈’은 198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문병란의 시집 「땅의 연가」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문병란이 조선대학교 문리대학 학생시절의 지도교수였던 시인 김현승의 추천으로 등단하게 된 1959년 시 ‘가로수’부터 1980년까지 씌어진 시 46편을 모아놓은 선집이다. 문병란의 대표작이 되는 ‘직녀에게’, ‘호수’와 향토색 짙은 ‘삼학소주’, ‘법성포 여자’, ‘화정동의 저녁노을’, ‘전라도 뻐꾸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집 「땅의 연가」에 수록된 작품 중에 몇 편의 시가 광주에서 활동하는 어느 젊은 작곡가의 손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다. 1977년 제1회 MBC대학가요제에 우리지역 대표로 참가해서 창작곡 ‘저녁무렵’으로 동상을 받은 전남대 트리오의 리더 박문옥이 바로 그다.
박문옥은 전남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다니던 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포크 트리오를 결성해 노래를 불렀다. ‘빈센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은 당시 광주 대학가의 명물로 떠오르고 1회 MBC대학가요제가 열린 1977에는 광주 지역 예선을 치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실력과 명성을 얻게 되어 광주MBC DJ 소수옥의 발탁으로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박문옥은 미술교사를 하던 멤버들을 다시 모아 ‘소리모아’라는 팀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한다. 소리모아는 1984년 발매된 앨범 「예향의 젊은 선율」과 1986년 독집앨범 「십년만의 외출」로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포크 뮤지션이 된다.
그리고 1986년 우리지역 최초로 음악을 제작할 수 있는 ‘소리모아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범능스님(정세현), 박종화 등 지역 음악인들의 앨범을 제작하고 80년대 민중가요 테잎을 제작, 배포하는 역할을 했다.
< 박문옥 앨범 양철매미 표지 및 목록 >
노래로 만들어진 ‘첫눈’은 2000년에 발매된 박문옥의 첫 솔로 앨범 「양철매미」에 수록된 곡으로 노래로 만들기 쉽게 문병란 시인이 원문을 직접 각색해서 박문옥에게 주었다.
박문옥 - 첫 눈 (문병란 작시, 박문옥 작곡)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사내들은 모두 예수가 되고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여자들은 모두 천사가 된다
여보게 우리도 이런 밤
소주 몇 잔 비우고 조금 취해
모닥불 가에 언 손 부비며
쓸쓸한 추억하나 만들어볼까
만원짜리 한 장에 꿈을 달래고
포실거리는 눈발에 맞춰
여보게 우리도 첫눈 밤 같은
사랑 하나 만들까
그립다
첫눈이 내리면 먼데 마을
하나 둘 등불 꺼지고
지금쯤 그리운 사람은
혼자서 외로이 잠이 드는데
창가에 기대어 먼데
여인의 발자국 소리 엿들어 볼까
이런 밤 우리도 고요히
손 모아 촛불 하나 지킬까
여보게 우리도 고요히
손 모아 촛불 하나 지킬까
앨범 「양철매미」에는 문병란의 시집 「땅의 연가」에 수록된 또 다른 시노래 ‘호수’도 함께 들어있다.
호수 (문병란 작시, 박문옥 작곡)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사람이 있다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
모든 사랑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만나야 할 그 사람이여
수많은 거리를 헤매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사람이 있다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
모든 사랑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만나야 할 그 사람이여
수많은 거리를 헤매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사람이 있다.
앨범 「양철매미」 발매 이전인 1985년에 이미 박문옥은 문병란의 시 ‘직녀에게’를 작곡해서 전국적으로 히트시켰다. ‘직녀에게’는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의 노래로 김원중이 처음 부른 이후에 최준호, 박문옥, 정용주, 조관우, 류영대, 인드라스님 등의 리메이크 버전이 있고 박문옥 40년 헌정음반 'Respect‘에서는 퓨전 그룹 '련'의 연주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박문옥은 2002년 두 번째 솔로 앨범 「운주사 와불 곁에 누워」에 제2의 ‘직녀에게’라 불리는 문병란의 시 ‘압록강 둑은 무사한가’를 노래로 만들어서 실었다.
압록강 둑은 무사한가 (문병란 작시, 박문옥 작곡)
눈물로 건넜던 이별의 다리
지금도 압록강 둑은 무사한가
스무 살 직녀는 할머니 되어
뗏목에 실은 사연 옛 노래 부르는가
압록강, 대동강, 영산강, 낙동강 강물은
바다에서 하나 되는데
분단세월 반세기 전설도 아닌데
건너 갈 은하수엔 다리조차 없는가
꼭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동정의 모진 세월 입술을 깨물며
북녀여 직녀여
그대 이름 부른다
다시 찾을 압록강 푸른 물결 부른다
다시 오를 백두산 통일세상 부른다
그 외에도 박문옥은 문병란의 시 ‘진달래 노래’를 작곡해서 2000년에 발매된 범능스님(정세현)의 1집 앨범 「오월의 꽃」에 실었다.
진달래 노래 (문병란 작시, 박문옥 작곡)
북녘땅 진달래 남녘땅 진달래
올해도 방방곡곡 곱게 피어나
서로 서로 정답게 손짓해 부르건만
가로막힌 철조망 기다림에 야위어 가네
진달래야 진달래야 불타는 순정
양바람 왜바람에 시들지 말아라
더욱더 붉게 붉게 더욱더 오래 오래
남과 북 골골이 어우러져 타올라라
사무친 그리움 사랑의 불길 되어
철조망도 무느고 방어벽도 무느고
서로 서로 정답게 얼싸 안아라
여윈 가슴 포근히 꽃 이불로 덮어라
< 지산동 시인 문병란의 집 >
광주광역시 동구 밤실로4번안길 16 (지산동 267-11번지), 문병란 시인이 1980년부터 2015년 별세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을 동구에서 매입해서 2021년 9월 ‘시인 문병란의 집’으로 만들었다. 시인이 생전에 썼던 작품과 가구,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박문옥의 개인 공연이나 소리모아 공연 때마다 늘 찾아주시고 격려해주시던 시인 문병란의 모습은 헌칠한 키에 늘 코트를 걸친 노신사의 모습으로 내 머리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시인이 떠난 지 10년이 되는 올해 9월에는 10주기 추모 시선집 「직녀에게」를 발간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지산동 ‘시인문병란의 집’에 들러서 노래로 만들어진 문병란의 시 ‘첫눈’을 들어보자.
박문옥 ‘첫 눈’ 링크 주소
https://youtu.be/YkKoFXZftig?si=sVcbBJBba-2FvK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