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과 저승길은 문학적으로 어떻게 형상화 했을까?
< 2018년 개봉한 신과함께 인과연 영화포스터 >
1. 저승의 모습과 문학적 상징
이승은 이 세상이지만 저승은 저 세상을 가리킨다. 저승이란 인간계 내지는 현실세계를 떠난 또 다른 세계로, 천상, 지옥, 아귀, 수라(修羅)와 같은 불교의 미망(迷妄) 세계는 물론 기독교의 연옥(煉獄)이나 낙원 등을 두루 포함한다. 실제로 유교와 불교에서는 저승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로 무속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무속에서 표현하는 저승은 이 세상을 그대로 투사한 이승의 반면(反面)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저승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로는 제주도 <시왕맞이제>의 <헤심곡>이 대표적이라 할 만한데, 망자가 저승차사인 강님도령을 따라 저승에 도착하여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형벌을 받은 후 저승에서 영원히 살 것인지 이승에 다시 태어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주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저승차사에 의해 끌려가는 저승세계는 봉건적 지배구조와 비슷한 계급이 형성되어 있어서 저승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생을 영위하는지보다는 주로 죄인을 심판하는 재판소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떤 통일된 명제론적인 계명이나 도그마가 먼저 선포되고 그것을 어겼을 때 지옥에 갈 것이란 관념은 없고, 그냥 대부분 인간관계의 중시에 온 마땅한 도리를 지키지 못했을 때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지옥의 묘사는 결국 인간관계의 중시에서 비롯된 삶이나 생 자체를 중시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대표적인 서사무가인 <바리공주>를 살펴보면, 서천 서역에 약수를 구하러 가는 바리공주가 저승세계에서 저승의 수많은 원귀를 인도하는 여정이 그려진다. 여기에서 천상계는 이 세상보다는 더 환경이 좋은 세상으로 보인다 했는데, 바리공주나 동수자 모두 천상계에서 죄를 짓고 적강(謫降)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천상계는 극락과 상통하는 세계인 반면에, 지옥은 죗값을 치르는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무속에서는 무가를 통해 저승의 면모가 일부 살펴지고, 문헌설화인 <보살불방관유옥>에서는 염라대왕이 잘못 잡혀 온 홍내범에게 저승의 곳곳을 구경하도록 하는데, 악한 짓을 했던 사람들이 참혹한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으로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구전설화에서 저승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를 여기에 일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그래 인자 얼마찜 따러 가니까, 자기가 과거에 보지 못헌 사람 사는 곳이여. 사람 사는 가옥이 있고, 좋은 집 궂은 집이 다 있어, 여전히. 이런 다 [뒷 편의 논을 손으로 가리키며] 전답도 있고 놈새밭(남새밭)도 있고, 다 이런 뭐, 화단도 있고 이렇게 되갖고 있어. 그런디, 한 기와집으로 떡 드르고(데리고) 들어 가는디, 기와집 첫 문을 떡 들어시니까(서니까) 문 앞 방에가(방에서) 웬 영감이 통양(統營) 갓을 방석마다 한(방석만 한) 큰 갓을 떡 씨고(쓰고), 앞에 책상을 놓고, 만권 서적을 쟁게(재) 놓고, 뭔 책을 들이다 보고 있어.(<저승 갔다 온 유생원>, 전남 고흥군)
② 저승이 멀다 해도 바로 문턱 밑이 저승이여. 그래가지고 인자 자기 문턱 밑을 본께 마당가세가 큰 지와집이 있그던. <중략> 그런께 인자 그 다리를 건너서 인자 그 영감님을 따라가 본께 허허 벌판에가 꽃이 피어서 꽃밭이 많이 있는디. 그 꽃밭을 상긋 보면서 간디, 간께는 인자 어디만큼 벌판을 가다본께는 좋은 지와집이 싹 있어. 있은께 인자 거그가 저싱(저승)이라 헌디 간께 좋은 지와집에가 문이 한 열두짝 이리 조루루허니 달렸는디, 열두짝을 그 영감님이 또닥 또닥 두드린께 열두짝문이 주르르 허니 열어져부러.(<저승에 간 여인>, 신안군 임자면)
지면상 일부 설화만 제시하였는데, 위의 설화를 구연한 화자들이 말하는 저 세상인 저승의 모습들이다. 여기서 저승은 지옥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천당이거나 천국이라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저승은 어느 부자가 남의 돈을 갚지 않았다 해서 하루에 열두 번씩 끓는 물에 들어가는 형벌을 받은 곳으로 묘사되거나 ‘쇠물 끓을 듯한 쇠꼬치로 불을 지르고 독아지(*장독) 속에다 넣갖고 불을 지르갖고 칼을 육체를 찔러자치면서 그 몸부림치는, 신음허는 소리 귀를 쟁쟁허는디, 눈 뜨고는 볼 수가 없드라’으로 묘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승이 멀다 해도 문턱 밑이 저승”이라는 화자의 말처럼, 저승은 ①에서는 사람 사는 곳처럼 좋은 집, 궂은 집, 전답, 화단 그리고 큰 갓을 쓰고 책을 보는 영감 등으로 표현된다. ②에서는 꽃밭, 기와집 그리고 자신을 데리고 간 영감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저승의 모습에서 가장 빈번하게 찾아지는 단어는 ‘기와집’, ‘꽃밭’이다. 화자마다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저승의 모습은 기와집이 있고,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여느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어찌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래서 저승은 수평적 공간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며, 현세적 삶의 공간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으로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 경험적인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관념적 세계인 저승의 형상에서 비현실적인 요소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저승은 사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주거지이자 종착지로 선과 악이라는 대극적 미래세계를 긍정하는 곳일 뿐이지, 그것의 구분이 아직은 없는 세계이고, 저승은 선자도 악자도 다 가야 하며, 그곳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세계라 했다. 저승은 죽어야 갈 수 있으므로 죽지 않은 한 알 수 없는 세계인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이 사람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의 폭을 확장시키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민중들이 구연하는 이야기에 담긴 사실성을 차치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무가에서처럼 구체적이거나 상세하지 않을지라도, 저승이 ‘기와집’과 ‘꽃밭’으로 소박하게 묘사되는 것은 그들이 죽어서 안주하고 싶은 세상에 대한 소망이고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기와집이 있고 사방으로 꽃이 즐비한 곳은 그들이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최고의 표현일 것이다.
이런 저승의 모습을 묘사하는 이야기가 대개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야기로 귀결됨에 따라 이승에 대한 갈망으로 환치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언젠가는 죽어서 가야 할 세상을 기와집, 꽃밭이라는 은유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할 것이다.
2. 저승길과 이승길의 모습과 문학적 상징
엄밀히 말하면 저승길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고, 이승길은 이승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을 말한다. 그러나 저승길과 이승길은 중첩되기도 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이승으로 돌아가라 해서 걸어가는 길이지만 그 길이 곧 저승에서의 길이기 때문이다. 단, 이승길은 저승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깨어나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점이 추가됨에 따라 저승길 묘사에 비해 구체적이다. 그래서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이므로 ‘이승길’이라 명명하였다. 먼저 저승으로 들어가는 길을 묘사한 설화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죽자마자 흰둥이 두 마리가 집 앞에서 날 기다리다가 데려가므로 따라갔지요. 밀밭, 보리밭을 지내서 갈대밭을 지나니까 큰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어요. 그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는 없고 긴 대나무 장대가 양쪽 강둑에 걸쳐 있어 그 대나무로 된 외나무다리를 밟고 건너갔어요.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니 큰 대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지나서 염라대왕 앞에 끌려갔어요.(「경북민담」)
위의 이야기는 죽은 영혼이 흰둥이를 따라서 밀밭, 보리밭, 갈대밭을 지나서 강둑에 대나무로 된 외나무다리를 밟고 ‘저승’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무사히 다리를 건너서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다.
한편, 구전설화에서 어떤 특정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다녀왔다고 할 때 비록 저승의 모습은 상세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이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대한 이승길 묘사는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여기에 이승으로 돌아가는 길을 어떻게 구연하고 있는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죽어서 갔는디. 흑한(*하얀) 거석에서 백상 개를 줌시로(*주면서), 그 개를 따라가라 그랬어. 갱아지를 줌시로. 그래 따러오다가 뭐, 삼대로 거 다리를 놨다 그랍디요. 그래갖고는 그거이 부러진께 기양 딱 깨어나불었어. 그 사람이. 삼대. 삼대로 다리를 놔줘. (<저승 갔다 온 사람>. 전남 고흥군)
② 하얀 백강아지를 하나 줬어. 안고서 외나무다리를 건너오다가 그 강아지를 턱 떨어지는 바람에 깜짝 깨니까 까무러쳤다가 피어났지, 사흘 만에. (<저승 다녀온 사람>, 경기도 포천시)
③ 그래서 맨발로 그걸 밟고는 강아지를 쥐고 따라오는데, 다리를 건네오다나니, 이놈의 다리가 훌딱 빠지니, 강아지도 빠지고, 자기도 빠지고, 홀딱 빠졌대. 그때 인제 펄떡 깨어 난거야.(<저승 다녀온 어머니>, 강원도 평창군)
④ 근데 개가 한 마리 하얀 놈이 따라오걸래 그 눔을 따라갔더니, <중략> 이제 애구, 이쪽 또랑네를 보니까 오막살이 집이 서너개 있는디. 이제 거기를 하두 못 들어서 배는 고파 죽겄구. 저 집이 가 밥 읃어 먹을까 하구 가는디 개가 졸졸졸 따라오더니 이 남자가 걷는데 딱 뿌러졌디야. 다리*** 밑이루 ** 떨어지다가 쳐다보니께 그때서 그 간호원이 깨났다고 막 벨을 눌르드라구.(<저승에 갔다 온 친구>, 충남 금산군)
이러한 구조를 갖는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유포되어 있다. 저승 관련 설화 가운데 저승의 모습을 형상한 이야기보다 이승으로 돌아온 여정을 상세히 묘사한 이야기가 훨씬 많은 편이다. 모두 이승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먼저 ①에서는 흰 개가 앞장서고 삼대로 놓은 다리가 부러지면서 이승으로 돌아오며, ②흰 개와 함께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개가 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이승으로 돌아온다. ③에서는 강아지를 안고 다리를 건너다 이 역시 다리에서 떨어져서 이승으로 돌아온다. ④에서는 흰 개를 따라가다가 다리 밑으로 떨어져 이승으로 돌아온다.
일부 사례를 들었으나 설화 속에서는 ‘개’, ‘다리’, ‘강’이 공통적으로 묘사된다. 개는 흰 개이거나 누런 강아지이며, 다리는 쉽게 부러질 것 같은 삼대로 놓은 다리나 외나무다리 혹은 그냥 다리로 묘사된다. 그리고 화자가 직접 강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생략하고 다리가 부러진 것으로만 구연하기도 한다.
모두 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부러지면서 강물에 빠져 깜짝 놀라서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점은 공통된다. 간혹 화자에 따라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빠지는 것으로 구연되기도 한다. 이렇게 이승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이 상세한 것은 그만큼 설화 전승자들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저승과 이승을 나누는 강은 삼도천(三途川), 약수(弱水) 등을 일컫는 것으로, 혹은 인간 수명의 끊임없는 흐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외나무다리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로, 이승으로 돌아오던 영혼이 다리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며, 새로운 탄생의 모태이다. 재생설화의 대단원이 물에서 내려지고 그 물에서 사자(死者)가 생자(生者)로 전환하는 것은 물에 들어가는 것을 형태 이전으로의 귀환, 완전한 재생, 새로운 탄생으로의 역행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승으로 간 영혼이 강물에 빠질 때 비로소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은 물을 매개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저승으로 간 영혼이 강물에 빠져야만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승길로 돌아올 때 다리[橋]가 어떤 다리인지에 대해 삼대 혹은 저릅대로 엮은 다리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베로 엮은 다리는 쉽게 부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을 밟으니 ‘타칵’ 부러져버린 것이다. 오히려 이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가 아니라 저승으로 온 영혼을 강물 속으로 인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강물과 다리가 연결되어 있어서 그 영혼이 생명의 원천인 강물 속에 빠지는 일련의 통과의례 과정을 지나서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게 말이다. 그래서 강물 위에 놓은 삼대로 엮은 다리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는 자궁의 탯줄을 연상시키게 한다.
한편, 저승을 안내하는 이는 저승사자나 조상이 나타나지만, 이승으로 안내하는 이는 대부분 흰 개나 누런 강아지가 등장한다. 일부 화자는 “강아지 하나 조그마한 것을 줘요. 귀가 쫑끗 해가지고, 눈꼽은 따닥따닥 졌는디, 그 놈이 사자여.”(전남 화순군)라 하여 개가 저승사자라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는 사람에게 충실하고 의리가 있으며, 충견설화가 널리 유포되어 있는 점을 착안한다면, 충직한 개가 저승을 떠도는 영혼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 홈페이지(https://gubi.aks.ac.kr)
이수자, 『죽음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창, 1990.
홍태한, 『한국 서사무가의 유형별 존재양상과 연행원리』, 민속원, 2016.
안병국, 「‘저승’관념에 관한 비교문학적 고찰」, 『한국사상과 문화』 26, 한국사상문화학회, 2004.
이은봉, 「한국인의 저승사자와 환생이야기」, 『한국종교연구』 2, 서강대 종교연구소,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