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설화 속의 저승사자는 어떤 모습일까?
<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인물인 '사자 보이즈' >
저승사자는 저승에 관한 구전설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요 모티프이다. 저승사자는 염라대왕이 파견하는 사자로, 이승의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해서 저승의 심판관인 염라대왕이나 그가 보낸 저승사자는 무서운 존재들로 묘사되기도 한다. 구전설화에 앞서 먼저 민요에서는 저승사자가 어떤 모습일지 내용 일부를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헌장삼은 폴에(*팔에)걸고 간단족박 손에들고
은천동우 폴에지고 심질로만 썩나서니
광주사는 이도령이 쇠사실(*쇠사슬)을 목에걸고
쇠사방만이(*쇠방망이) 손에들고 날잡으로 여겠다네
(<저승노래>, 전남 고흥군 도양면)
뒷문밖에 삼사제는 나를잡으러 오는 사제로구나
쇠사슬을 목에걸고 쇠방매이로 들체메고
엉그렁정그렁 들어온다
(<저승노래>, 전남 고흥군 풍양면)
이 <저승노래>는 저승사자에 의해 저승으로 잡혀가는 과정을 노래로 부른 것이다. 여기에 저승사자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는데, 쇠사슬을 목에 걸고 쇠방망이를 손에 든 저승사자, 한 손에는 장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철봉을 든 저승사자의 모습이어서 사람에게 위협적으로 묘사된다.
이에 반해 구전설화에서 저승사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① 문턱에 죽챙이(죽창 들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가 칼을 이런 걸 가지고 시뻘건 게 문턱에 섰더라구.(<저승 다녀온 사람>, 경기도 포천시)
② 집에서 이렇게 인자, 이렇게 팽소겉이(평소같이) 있는디, 있는디 웬 사람들이 서이서(셋이서), 버얼건(빨간) 옷을 입고 들오더래, 세 넘(놈)이. 빠알간 옷을 입고, 몽두이(몸둥이)를 각자 하나썩(씩) 들고 들어와. 들어오더니, 자기를 나오라 그래. 그러자 겁에 질려 가지고 따라 나가니까, 사랍(사립) 밖으로 디리고(데리고) 가. “우릴 따라 오라.”고. 얼마찜(쯤) 가니께, [기억이 안 나자 잠시 중단] 이번에 새카만 옷을 입은 놈들이 서이서 나타난다 그 말이여. 아, 그러더마는, 그 새카만 옷 입은 놈인데(놈들에게) 인계를 해, 붉은 옷 입은 놈 세 놈들이. “이 사람이라.”한께, “아, 그리야(그러냐)?”고. 인계를 딱 맡어가지고, 자기를 또 데리고 간다 그 말이여. “따라 오라.”고.(<저승 갔다 온 유생원>, 전남 고흥군)
③ 꿈 꿨다고, 저승에 갔다 와서 꿈 꿨다 그래. “…거거를 간께, 시(셋) 냄이(놈이) 와서 날 보고 가잡디다. 패랭이 친놈들이.(<저승 갔다 온 며느리>, 전남 고흥군)
앞서 <저승노래>에서의 저승사자는 쇠사슬이나 쇠방망이를 든 모습이었으나 위 이야기에서는 죽창을 들고 서 있는 저승사자, 붉은 옷,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 패랭이를 쓴 저승사자 등으로 묘사된다. 무엇을 들고 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를 간단히 말할 뿐 더 이상 구체적이지 않다. 구전설화에서 실제 저승사자의 묘사가 상세하지 않은데, 이는 저승사자가 여느 사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전제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해석된다.
무속에서는 저승에 여러 사자가 일들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다는데, 가장 대표적인 차사는 ‘강림차사’라 한다. <시왕맞이제>의 <강님차사본풀이>에 강님이라는 사람을 염라대왕이 탐을 내서 저승으로 데려간 뒤에 동방삭을 잡아 와서 마침내 차사가 된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혼령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가 사실은 이승에서 보통 사람과 똑같이 살았던 강님이라는 것은 죽음 세계가 결코 차가운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의 반영이며, 이승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저승으로 들어와 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이승이 저승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홍태한, 「한국 무가에 나타난 저승」, 『한국문화연구3집』, 2000)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무속과 무가에서는 저승사자가 극적 요소를 동반하여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구전설화에서는 저승사자의 외모는 소략하지만 그 행위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저승사자의 행위로 인해 사람들이 벌이는 사건들이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설화를 살펴보면 저승사자의 행위는 크게 ‘실수’, ‘무능’, ‘거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저승사자가 실수로 이승의 영혼을 잘못 데려간 이야기는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구전설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여러 각 편이 있으나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사자가 잘 모르고 한 동네 가서 이름이 둘 있으믄 요놈이 긴지 저놈이 긴지 확실히 모르고 잘 못 잡아가. 그런 수가 있어요. 근게 동네 한, 같은 이름이 있으믄 그거 별로 좋지 않은 것이여. 안 좋아요. 이 지금도 이렇게 밝은 세상에도 뭐 재판허믄 잘 못 해갖고 오판해갖고. (중략)(<동명이인 잘 못 데려간 저승사자>, 전남 나주시)
이렇게 이름이 비슷하여 저승사자가 이승의 영혼을 잘못 데려간 사례는 많은 편이다. <저승에 다녀온 북실 진상섭>에서는 저승으로 잡혀간 북실 진상섭이 산서면의 진상섭을 데려와야 했는데, 잘못 데려왔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본래 무주에 살던 그 여인 또한 저승사자의 실수로 잘못 온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난 진상섭은 무주로 그 여인을 찾아갔고 그 여인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보면서 저승에 다녀온 것을 확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 저승사자의 실수가 빈번한 듯하며, 그래서 저승사자의 실수로 인해 이승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 간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저승사자가 실수로 사람을 잘못 데려간 이야기> (경기 파주시)에서는 저승사자가 김가(金家)를 잡아 오라고 했는데, 실수로 이가(李家)를 잡아왔다가 다시 돌아가게 했다. 자신의 몸이 이미 죽어 있어서 원래 죽기로 되어 있던 이가의 몸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래의 몸이 아니어서 습관이나 부인 등이 잘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저승사자가 실수로 이승의 영혼을 잘못 데려가는 바람에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이 실수하며 살아가듯 저승사자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저승사자의 실수가 빌미가 되어 다양한 이야기가 파생되는 점은 설화가 민중들의 다양한 상상력이 응축된 문학이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시켜준다. 이런 저승사자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 ‘무능’하기까지 한데, 이에 관한 이야기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왕만석이가 백 살이 다되었는데 염라국의 저승사자들이 그를 불러오려 하였으나 데려오지를 못했다. 게다가 왕만석은 집 주위로 탱자나무를 심어놓고 문턱 없는 대문에 청삽살개를 키우고 있어서 저승사자들이 들어가기가 더욱 힘들었다. 마침 화개에 힘이 센 김씨가 갑자기 죽어 염라국에 가니 염라대왕이 왕만석를 데려오면 자신이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김씨는 좀처럼 들어갈 수 없는 왕만석의 집에 들어가서 그를 염라국에 데리고 간 뒤에 자신은 다시 살아나서 왕만석 집으로 조문을 갔다는 이야기이다.(<화개 신촌 김장사와 왕만석>, 전남 구례군)
왕만석이라는 사람이 저승에 잡혀가지 않기 위해 탱자나무, 청삽살개를 내세워 버티고 있는 바람에 저승사자가 들어가지 못하자 힘이 센 김씨를 통해 결국 왕만석을 저승으로 데려간다.
저승사자가 하지 못한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이러한 이야기는 <힘센 권장군>(경남 울주군), <고삼백이 저승에 잡혀간 이야기> (경북 청송군) 등의 이야기와도 유사한 구조이다. 그리고 <힘센 권장군>에서도 저승사자는 탱자나무가 무서워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설화 속에서 도깨비가 말피를 제일 무서워하듯이 저승사자는 탱자나무를 제일 무서워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통 가옥의 담장을 탱자나무로 두른 것은 이러한 데서 연유를 찾을 수 있겠다. 또한 저승사자가 무서워하는 것으로 삽살개가 나오는데, 이는 앞서 이승길을 인도하는 중간자가 개로 형상화 되는 것과 상관성이 찾아진다. 이승길로 가는 사람을 개가 안내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올 수 있는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장치이듯이 저승사자와 같은 귀신을 쫓기 위한 장치로도 해석된다.
또한 저승사자는 탱자나무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행색이 괴이한 사람도 무서워한다. <저승사자를 쫓는 오성대감>(충북 청주시)에서는 저승사자가 오성대감의 위세에 눌려 아이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저승사자도 도망가게 한 영감> (경남 합천군)에서는 할머니가 앓아 눕자 할아버지의 입성이 좋지 않았는데, 어느 날 더렵혀진 옷을 벗고서 부엌에 수제비를 만드는 와중에 끓은 물이 온몸에 튀어 행색이 괴이했다. 마침 저승사자가 할머니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가 할아버지의 행색을 보고 이때까지 차사를 하고 다녀도 저런 놈은 처음 봤다며 무서워 도망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저승사자임에도 되레 인간을 무서워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해버린 것으로 저승사자의 왜소함과 무능함이 강조되는 설화라 하겠다.
저승사자의 행위는 이러한 ‘실수’, ‘무능’ 외에도 ‘거역’을 들 수 있다. 저승사자가 인지하지 못한 채 이승의 다른 영혼을 데려오는 경우를 ‘실수’라 한다면, 알고서도 인정(人情)에 끌려 염라대왕의 명을 ‘거역’한 경우가 있다.
익히 알려진 <동방삭이 삼천갑자를 산 내력>은 삼십갑자의 단명할 운을 타고난 동박삭이 저승사자를 잘 대접하여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곽정식은‘사람의 수명은 염라대왕 또는 옥황상제가 관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후대의 자료를 통해 수명 연장 방법이 저승사자를 대접하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저승사자가 명령을 거역한 것이라 봐야 한다. 저승사자가 자신을 대접한 사람들의 정에 끌려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한 동네에 영감이 아파 저승에 갈 준비를 하려고 마을 삼거리에 크게 음식을 차려 놓고 비손을 하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와서 음식을 먹고는 막상 영혼을 데리고 가려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이와 성이 같은 옆집 사람을 데리고 가버렸다. 저승에서는 그를 다시 보냈으나 이승에서는 이미 염까지 다해버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급히 비손 하는 집의 할아버지 몸에 영혼이 들어가서 깨어났는데, 식구들을 보고 내 식구가 아니고 옆집의 가족을 내 가족이라고 하였다.(<남의 혼이 들어 살아난 사람>, 경남 함양군)
위의 설화는 저승사자가 사람들에게 대접받은 것이 미안해서 나이와 성이 같은 옆집 사람을 데리고 가는 일을 벌인다. <저승차사 대접하여 손자 구한 조부> (경북 달성군), <저승차사 대접하여 아들 구한 이야기>도 이와 유사한 구조인데, 심지어 <무당이 대감 찾는 유래> (충북 청주시)에서는 죽어서 저승사자가 된 사람이 친구의 손자를 저승으로 차마 데리고 가지 못해서 3년간을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헤매기도 한다. 모두 저승사자가 염라대왕의 명을 거역하고서 사람들 편에서 일을 처리한다. 저승의 존재임에도 저승사자의 행위 면면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이다.
구전설화에 등장하는 저승사자는 저승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승에서의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염라대왕은 거역할 수 없는 권위의 상징이지만,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저승사자는 그가 벌인 행위 즉, ‘실수’, ‘무능’, ‘거역’ 등의 인간적 행위로 점철된다.
이러한 점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긍정의 출구로 기능한다. 죽음은 인간이 거역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하늘이 정한 운명대로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들이 상상 속에 만들어낸 저승사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순화시키고 변환시킨다. 그래서 저승사자가 실수하거나 무능하거나 거역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수명을 연장하거나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받는다.
이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음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그러면서 저승세계도 이승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과 평안함을 찾고자 한다. 저승사자의 면모와 행위가 궁극 민중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면서 동시에 무한대로 확장시킬 수 있는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민중적인 인식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