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준의 책읽기]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성과사회와 마음의 질병
몸과 마음이 몹시 피곤하다. 고도화된 사회와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내 마음이 어지럽다. 이상은 저 높은 곳에 있는데 현실은 밑바닥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고단한 삶 속에서 발걸음은 갈팡질팡하고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간다. 특히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좌절과 절망은 필연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아왔지만 나아지기보다는 제자리를 맴돌 뿐 행복은 아득하기만 하다. 결국에는 얻고자 했던 거친 욕망이 나를 괴롭히고 공격하는 심적인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
동물들은 사색의 여유가 없다. 먹이를 구하거나 짝짓기를 할 때 항상 천적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인간사회는 야생동물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녹아들고 있다.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한 성과사회에서 사람들의 사유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피로사회’는 정신적 질환의 발병 이유를 사회적,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 이다. 책의 첫 구절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요한 질병이 있다’고 시작되고 있다.
저자는 지난 20세기를 면역학적(강제, 규율, 금지, 의무, 결핍)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는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배타적 시대였다. 면역의 근본 특징을 부정성의 변증법으로 봤다.
후기 근대에 해당되는 21세기 초는 우울증, 주의력 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신경성 질환들이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파생된 질병으로 봤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우울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우울증은 공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산업혁명이 거듭되고 기술문명의 발달은 사회적 질병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규율사회는 성과사회로, 성과사회는 도핑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성과창출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기꺼이 약물에 의존한다. 결국 도핑은 성과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미셀푸코’가 주장했던 규율사회(감옥, 공장, 병원, 병영)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았다. 반면 성과사회(피트니스 클럽, 오피스빌딩, 대형쇼핑몰)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 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라고 봤다.
‘한트케’는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라고 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정신적 질병을 해소할 대안을 제시한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성과사회의 부작용은 외적 강요 보다는 이기적인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성공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정신적 빈곤함으로 허덕이고 있다. 사색과 성찰을 통해서 예속된 삶의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주인으로 거듭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