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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현의 세상유감] 책임의 얼굴, 정책실명제!

박지현| |댓글 0 | 조회수 366

급식 빵을 받아 든 친구가 흐느끼고 있었다.

“울어?”

“내가 빵을... 빵을...” 말끝을 흐리던 아이는 이내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급식용 빵과 우유는 한 달 급식비를 내면 배달되어 제공되었다.

나는 빵과 우유를 들고 있을 때의 친구들의 간절한 눈빛과 “한 입만” 하는 속삭임을 외면하지 못해 거의 먹지 못하곤 했는데 그래서 선생님은 아예 수업 중 복도로 나가서 먹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게도 무료로 제공되기 시작했다.


그날은, 나를 부러워하던 친구가 무료 급식 빵을 받은 날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이던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사람에게는 빵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바로 ‘자존’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문제는 ‘빵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유료 급식 빵은 3교시가 끝날 무렵 나눠주었지만, 무료 급식 빵은 학교가 파한 뒤 따로 남겨 지급했다.

누가 무료 급식을 받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광주가 뉴스에 떠들썩하게 등장했다.

‘민생회복 소비쿠폰’ 선불카드의 색상이 구별되어 저소득층이 누구인지 식별 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친구의 눈물이 떠올랐다.

그리고 광주시의 인권 감수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는 달라지지 않은 것일까?


“책상 위의 서류 한 장이, 때로는 사람의 인생 전체를 흔든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한 장의 문서에는 방향이 담겨 있고, 때론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결정이 들어 있다. 그럼 이 문서는 누구의 것인가? 광주시장? 행정기관?

사실 우리는 모른다. 내가 들은 바로는 이 카드건은 실국장 전결 사항이었다고 한다.

발제자부터 국장까지 올라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정무직 한 명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과연 시장이 바뀌면, 이런 일이 사라질까? 

그 문서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발제자는 누구였는지, 검토자는 무엇을 보았는지, 결재자는 어떤 판단을 했는지.

그 모든 과정은 ‘시스템’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버렸고, 정작 책임은 흐려졌다.

그리고 그 흐려진 책임은 결국 신뢰의 실종으로 이어졌다.

시장이 바뀐다 한들 조직이 변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반복적으로 되풀이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공무원 실명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도청 앞에 설치된 30억짜리 미디어아트 분수 쇼가 불과 1년 만에 철거되었다.

그리고 다시 예산을 들여 음악 분수로 바뀌었다. 이 모든 과정과 결정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비단 이것뿐일까? 생각은 많지만 여기에서 언급은 이 정도로 그치겠다. 

공공의 일은 이름 없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서 책임은 흐려지고, 행정은 익명성이라는 방패 뒤에 놓인다. 물론 익명성은 부당한 민원이나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공무원을 지켜주는 기능도 한다.

그러나 그 방패는 점점 더 두꺼워졌고, 결국 시민과의 사이에 벽이 되었다.


대만은 1990년대부터 주요 정책 문서에 작성자, 검토자, 결재자의 이름을 명시해왔다. 일본 역시 행정 문서나 예산 자료에 관계자의 이름을 기재하며, 그 이름은 책임이자 명예가 된다.

행정이 ‘얼굴을 가진 일’이라는 전제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2013년부터 정책실명제를 도입했다.

공무원의 실명과 의견을 기록·관리해 정책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름이 기록되는 문서는 제한적이고, 대부분 ‘중점관리사업’에만 해당된다. 그마저도 형식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윤석열 정부를 맞아서는 그마저도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 대만처럼 당당하게 이름을 새기지도, 일본처럼 의견을 남기지도 못한다.

서류에는 이름이 없고, 시민은 책임을 물을 사람을 알지 못한다.


광주는 어땠을까.

그 카드의 색을 고른 사람, 시민의 시선을 예측했어야 할 사람, 마지막 결재를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


행정이란, 결국 사람의 일이다.

책상 위의 서류 한 장도, 빵 하나도, 카드의 색 하나도.

그 안에 담긴 결정에는 책임의 얼굴이 있어야 한다.

그 얼굴을 드러내는 용기, 그것이 민주주의의 첫걸음 아닐까.

실명은 감시가 아니라, 설명의 출발이다.

이름을 남긴다는 건 “나는 이 결정에 참여했고, 그 책임을 갖겠다.”는 조용한 서약이다.

잘못을 추궁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신뢰를 쌓기 위한 시작이 되어야 한다.

실명제는 조직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 그리고 ‘행정’에 책임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 이름은 단순한 기재가 아닌, 책임과 신뢰의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전면적인 실명 공개를 당장 요구할 수는 없다.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조금, 인허가, 징계, 민원 처리 등 국민의 권익에 직결되는 사안부터 시작해, 점차 정책 수립, 내부 문서로 확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부 공개에 앞서 내부 기록용 실명제를 도입해 정보공개 청구나 감사 요청 시 추적이 가능하도록 설계하는 것만으로도 첫발이 될 수 있다.

공무원을 보호하는 장치도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실명이 부당한 민원과 정치적 비방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신변 보호와 책임 분산 시스템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국민이 묻는다.

“이 결정을 내린 분은 누구인가요?”

그 물음에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회!

“네, 제가 책임자입니다.”

그런 사회가 신뢰받는 사회 아닐까?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이제는 이 제도를 말할 때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책임이란, 이름을 걸고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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