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운동의 빛나는 별, 조신성(趙信聖)
이제 광복 80주년이 다가온다. 지난 6월 3일 새 정부가 탄생한 후 두 달 동안 내란세력의 준동이 계속되어 날마다 전 정부의 온갖 비리와 범죄 행각들이 뉴스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 정부의 과제는 엄청 무거울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내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80년 동안 각계각층에 뿌리내린 반민족 매국 세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 내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은 36년 동안 일제 치하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열정과 활약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중등 교과서에는 그들에 대한 소개가 아주 미미하며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유관순 외 거의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한편 우리 사회는 현재 검찰을 비롯해 사법부와 언론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중요한 개혁은 교육에 대한 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최고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파렴치범이 되었는가? 결론은 파행적인 교육정책에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 중 여성의 교육활동과 항일투쟁을 병행한 조신성의 생애는 오늘날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이정표가 되리라 생각한다.
조신성(1873~1953)
1873년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現 피현군 피현읍) 피현역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어머니 한씨의 배 속에 있었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9살 되던 때에는 어머니마저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살 되던 해에 어느 남성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결혼 생활 6년 만에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결국 그녀는 22세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평안북도 의주읍 교회에서 선교사 W.M.베어드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의지할 곳 하나 없이 과부로서 천대받고 있다가 기독교를 통해 자신이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귀중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고, 이후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살아갔다.
그녀는 24세 때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다녔고, 이후엔 상동의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28세 되던 때부터 6년 동안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했다. 이와 동시에, 창덕궁 방을 한 칸 빌려서 이준과 함께 조선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녀는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민족운동가와 교제했는데, 그중 가장 친밀하게 지낸 이는 바로 안창호였다.
그녀는 34세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녀는 일본 간다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요코하마 성경여학교 고등과에 다녔다. 그녀는 귀국 후에도 계속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그녀는 귀국하자마자 부산 규범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10년에 사직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직을 맡아서 활동했다.
맹산독립단을 조직하고 안창호와 함께 평양 진명여학교를 운영하다
평양 진명여학교는 안창호의 주도로 설립된 학교였다. 진명여학교는 점차 번창했지만,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안창호가 해외에 망명하고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던 평양부인회가 쇠퇴하면서 폐교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조신성은 이 학교에 부임한 이래 최선을 다해 학교를 다시 번창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1911년 4월부터 학생 모집에 주야로 힘쓴 결과, 진명여학교 설립 6년 만에 학생이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1919년 11월 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와 연계하여 맹산독립단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고, 구성원은 19명 정도였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도화선·권총·인쇄기와 활자 등을 사들여 맹산의 선유봉(仙遊峰) 호랑이굴에 감추어 놓고, 사형선고문을 인쇄해 일본 관헌과 친일파들에게 보내 심리적 위협을 하였다.
대한독립단 청년을 구하기 위해 불심검문하는 일본 순경을 껴안고 뒹굴어 공무집행방해죄로 6개월 징역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만기 출옥할 즈음 맹산 선유봉의 독립운동 활약 사실이 밝혀져 또다시 복역하게 되었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우체부를 습격, 3,000원을 빼앗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9일자)
근우회 활동과 교육사업에 매진하다
1927년 12월 24일에는 박현숙(朴賢淑)·한영신(韓永信) 등과 함께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근우회 회관을 설립하고, 여성들에게 경제 의식을 일깨우고 실업여성의 직업 확보를 위한 실행사업으로 속옷공장 설립을 기획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여성운동을 실행했다.
1934년 <신가정> 잡지의 한 기자가 "직접 운동을 실행하시는 동안에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슴에도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하고 (중략)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가지고는 격투하거나, 오도 가도 못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다시 교육운동에 매진해 평원군 한천에서 사숙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쳤고, 대동군 대평에서 취명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4년 9월 평양의 각계 유지 150여 명이 모여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의 회갑연을 열었다. 평양 유지들이 회갑연을 개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성계 인사로는 조신성이 처음이었다.
“일거리 많은 조선에 태어난 것은 더 없는 천행이지만 일터에 알맞은 일꾼이 되지 못하니 부끄러울 뿐이다.……다만 내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60평생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것을 가려 내가 맡은 공사(公事)를 저버린 적은 없다. 이것이 나의 신조요, 기운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내 나이의 40년을 깎아 20당년의 청년으로서 다시금 조선의 일터에 몸을 바치려 한다.” –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의 회갑연 답사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들어왔다. 김일성을 위시로 한 북한 정권은 그녀의 명성을 높이 사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에 임명해 공산주의운동에 동조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조신성은 공산주의자들이 무산계급 독재를 외치며 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는 것에 혐오를 느끼고 1948년에 월남해 대한부인회 총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다가 부산의 신망애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0세.
한국 최초의 여성 기자로 활동했던 최은희는 1956년 월간지 <여성계>에 '애국여성 조신성 할머니'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그녀는 조신성에 대해 "한평생 애국운동에 몸을 바치신 분이다. 그는 동족을 위하여 가시덤불을 헤쳤고 엉겅퀴에 피를 흘린 이름 그대로 미쁘고 갸륵한 여성이다."라고 평가했다. 오기영도 조신성을 여걸로 평가했다.
이후 그녀의 유해는 1991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조신성은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선택하였고 민족지도자로서 철저한 책임감을 가졌다. 또한 여성을 계몽하여 민족주의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여성 독립운동을 펼쳤다. 평생을 애국애족에 대한 그의 헌신은 현재 우리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정확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