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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억에서 5·27기억까지, 광주 기억공동체의 변신과 헌법전문의 새로운 탄생

배이상헌| |댓글 0 | 조회수 97

2025년 오월은 탄핵 후 윤석열 내란세력 척결을 향한 큰 고비를 넘기는 시간들로 대선 코앞이었다. 다행히도 5·18역사계승의 진정성을 갖추었다 기대하고픈 대통령을 선출하기까지 보람차고 뿌듯한 5월이었다. 


2025년 오월은 내용적으로도 풍성했다. 45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의 과제는 여전히 바쁘기만 하고, 사실 미루어둔 숙제들도 많다. 그래서인지 구 도청앞 민주광장의 손길 발길이 바빴던 것도 지켜보는 이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26일 저녁부터 27일 새벽까지 진행된 <5·27승리의 날 새벽광장>행사는 다양한 참여와 풍부한 내용으로 5·18기념행사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고 평가하며 박수를 보낸다. 5·18을 지켜내고, 5·21을 시민의 날로 주목하며 드디어 우리는 5·27에 다다랐다. 


80년 5월을 총칭하여 5·18이라고 명명하지만 사실 이 사건의 굴곡은 80년 이후 한국 현대사의 지진을 이끌어낸 진원이 되기까지 짧은 시간 복잡한 변곡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 적절히 주목하고 제대로 알리는 것이 5·18역사계승의 핵심이다. 


80년 5월 광주를 주목할 때 5·18은 국가폭력의 시작점이며 5·21은 시민공동체를 성취한 날이다. 5·21이후 항쟁은 광주의 항쟁이 된 것이다. 5·27은 마지막 패배의 날이지만 승리의 날이다. 5·27이 아니고서 어찌 80년대 저항의 역사를 상상할 수 있으랴. 5·27을 통해 5·18은 전국의 5·18로 부활할 수 있었다. 

따라서 5·18의 기억에서 5·27을 정조준하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수월해졌지만 학살세력의 마지못한 양보로 5·18을 교육하던 오랜 세월(거의 2010년대 중반까지도)은 교단에서 시민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었고 따라서 5·27을 말하는 것도 튀는 교육이었다. 국가폭력의 잔혹함을 폭로할지언정 시민의 무장, 무장항쟁을 말하는 것은 뭔가 불순하고 과격한 것으로 의심받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다가 5·27을 말하는 것이 수월해진 것은 누구보다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탄압 때문이었다. 기념행사가 있기 전부터 5·18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왜 그들은 건드렸던가? 그것은 신군부 계승 세력의 큰 패착이었다. 노래에 대한 탄압을 계기로 전국의 민주시민들은 위 노래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 너무도 감동적인 마지막 5·26의 결단에 대해 큰울림의 전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로소 시민군을 정조준하며 이야기의 큰울림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점에서 ‘5·18교육’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교육과 다르다. 5·18재단이 5·18교육을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에 대한 교육을 모델로 접근한 것을 보았지만 필자는 동의할 수 없고 다른 생각을 갖는다. 


‘5·18교육’에는 잔혹한 학살과 인권탄압, 국가 파시즘을 목격하는 것 그 이상의 시민의 노래가 있다. 분열과 무기력의 과정 속에서 참담한 학살을 겪어야 했던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와 달리 5·18은 5·21과 5·27로 비상하며 질적으로 승화하였다. 5·18에는 학살 그 이상의 저항과 대동의 공동체가 있다. 


아우슈비츠 학살의 이야기에는 참혹함에 대한 반성과 인권의 소중함을 교훈적으로 발견하지만 광주, 저항과 대동의 공동체는 억울한 시민의 죽음을 폭도로 만들지 않고자 역사를 믿고 죽음을 감수하는 시민군의 최후항전이 있었다. 


한 가지 강조하고픈 것은 5·18이 저항과 대동을 이야기하며 저항의 표상은  ‘시민군’으로, 대동의 표상은 ‘주먹밥’으로 구성하는데, 저항과 대동은 그렇듯 병렬적 관계가 아니다. 시민군이 있었고, 시민은 이를 주먹밥으로 옹호하고 함께 지켰다는 방식의 병렬적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시민군의 탄생은 시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신군부가 주장한 ‘폭도의 죽음’이나 ‘계엄군의 불가피한 자위권’이라는 허구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저항의 논리이자, 대동 정신의 실천이다. 

시민군의 마지막 저항은 저항과 대동이 하나로 어우러진, 숭고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였다

 

2024년 5.18조사위의 보고서는 허접했다. 극우세력들의 5·18왜곡은 더욱 집요하고 교묘하다. 한편 12.3내란과 <소년이 온다>의 노벨상 수상을 목격한 민주시민들은 5.18의 역사적 현재성을 체감하였으며 그래서도 2025년 5월 전국 각지의 시민사회단체들의 광주 방문은 발걸음은 그만큼 절실했다. 


이재명 국민주권정부는 5·18기억투쟁의 지난한 과정을 마감하고 5·27을 포함한 5·18항쟁(‘5·18민주화운동’이 아닌)을 헌법전문에 담으리라 기대한다. 헌법과 헌법전문은 역사의 진실을 감춘 정치적 타협의 용어로 등재해선 안 된다. 국민주권의 순결한 승리의 역사가 담긴 헌법전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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