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LP 이야기
2000년대 초반에 내가 운영하던 LP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에게 LP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질문했는데, 그 학생이 "레코드판의 약자 아니에요?" 하고 반문했던 적이 있었다. LP를 접하지 못한 그 학생에게는 생소했던 LP는 'Long Playing'의 약자다. LP가 나오기 전에는 SP 음반이 생산됐는데, SP를 LP의 반대 개념인 'Short Palying'이라 생각하겠지만 SP는 'Standard Playing'의 약자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생산되기 시작한 SP음반은 그 무게가 상당했고 떨어뜨리면 깨지는 특성에 일명 ‘돌판’이라 불렸다. SP음반의 크기는 지름이 25cm인 10인치짜리가 주종을 이뤘고 회전속도는 1분에 78회전이었다. 재생 시간이 한 면당 5분이 채 되지 않아서 음반 한 면에 한두 곡밖에 싣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SP음반은 50년대 말까지 생산되었고 60년대 초반부터는 LP시대가 시작되었다.
LP가 처음 등장한 시점은 정확하지 않은데 1947년에 미국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나온 LP를 최초의 LP로 보고 있다.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나온 LP는 12인치 크기에 1분에 33과 1/3 회전하는 속도였고 빅터에서 나온 레코드는 7인치 크기에 45 회전속도로 재생되었다. 이 45회전 음반은 나중에 ‘Extended Playing’의 약자인 EP로 불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EP를 보기 힘들었다.
서구에서는 가수의 앨범이 나오면 그 앨범 속에서 히트가 예상되는 곡, 한두 곡을 담은 싱글레코드를 EP음반으로 만들어서 많이 보급했다. 비싼 값을 주고 전곡이 수록된 LP를 사는 것보다 듣고 싶은 곡만 싼값에 살 수 있는 싱글레코드가 더 많이 유통되었고 이 싱글레코드 판매량과 방송 횟수를 집계해서 순위를 매긴 것이 빌보드 싱글챠트다.
싱글레코드는 음반을 거치하는 가운데 구멍이 커서 ‘도너츠 판’이라고도 불렸는데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어댑터를 사용해서 재생했다. 그리고 턴테이블에 달린 속도 조절 레버나 버튼을 45회전으로 맞춰야 했는데, 음반을 올리고 속도 변환을 하지 못한 채 33과 1/3 회전으로 재생하면 음성 변조된 소리가 나서 진행자들이 당황하는 일도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LP는 1958년에 우리 전통 민요를 수록한 'KBS레코드'인데 LP는 재생 시간이 한 면당 30분 정도인 데다 음질이 좋아서 1960년대부터 양산되었고 1995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LP에 들어 있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재생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다. 일제강점기가 전성기였던 SP시대에는 유성기나 축음기를 이용해서 음악을 들었고 70, 80년대가 전성기였던 LP시대에는 전축이나 오디오 시스템에 포함된 턴테이블을 이용해서 들었다. 어느 시대나 음반 가격은 상당히 고가였고 축음기나 전축의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일반인들은 다방이나 음악감상실에서 레코드로 틀어주는 음악을 들었다.
70년대 전축은 두 가지 스타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해서 허락 없이는 손댈 수 없었던 별표 전축, 독수리표 전축이었고 또 하나는 조금 논다는 학생들이 산으로, 바다로 놀러 갈 때 사용했던 휴대용 야외전축이었다. 야외전축은 ‘야전’이라고 불렀다. 거실의 럭셔리한 전축에서는 당시의 국민가수였던 이미자, 배호, 패티김, 남진, 나훈아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여름 휴가철 해수욕장이나 날씨 좋은 날 동네 야산에서는 청년들이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비치보이스, 벤쳐스의 로큰롤 음악을 틀어 놓고 고고춤을 추어댔다.
80년대 들어서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서 전축도 고급화되고 다양한 제품이 나오게 되는데 삼성전자의 르네상스, 롯데전자의 아반테, 태광전자의 에로이카, 동원전자의 인켈 등의 하이파이 컴포넌트 전축이 이때 나왔다.
서울에서 1965년에 처음 방송한 FM음악방송을 우리 지역에서는 80년대 초반에 방송하게 되는데 AM라디오에 비해 뛰어난 음질로 방송하는 FM라디오는 LP 판매량 상승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60년대부터 충장로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음악감상실이나 음악다방은 LP판의 최대 소비처였다. 1968년에 문을 연 광주 최초의 음악다방인 화신다방은 주한미군이 주둔하던 송정리 공군부대로부터 흘러나온 원판 중심의 음반을 갖추고 소수옥, 이용완 등 광주의 이름난 DJ들이 출연해서 광주 음악다방 명소가 되었다. 80년대 초 광주에서 가장 많은 LP를 갖춘 음악감상실은 당시 광주백화점 4층에 있었던 ‘조이’ 음악감상실로 LP가 1만 장이 넘었다.
광주에서 음반을 판매하기 시작한 곳은 SP음반 시대인 193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문을 연 악기점이나 시계방이었다. 일본인들에 이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음반을 판매하는 상점을 개업하는데 1930년대 남해당 악기점이 유명했다. LP가 시작되는 1960년대에 레코드 가게들이 속속 문을 여는데 1963년에는 충장로 4가에 광주소리사가 문을 열었고 그 외에 충장로 5가에 금성레코드, 대인동 광주역 앞에 대광레코드, 궁동에 빅토리 레코드사가 개업했다.
70, 80년대에는 변두리나 대학가에도 레코드 가게가 들어서는데 학원가였던 대의동에 문을 연 ‘25시’ 레코드사, ‘명음사’는 몇 번의 이전을 통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광주의 레코드 샵이다.
70, 80년대 광주의 음악감상실에서 LP음반을 통해 나오는 음악은 포크, 발라드 가요와 팝송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서슬 퍼런 군부독재 정권 시대에는 듣고 싶은 음악을 맘대로 들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금지곡이 있었고 금지곡에 대한 갈망이 커져 갈 때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값도 저렴하고 금지곡이 원본 그대로 수록되어 있던 ‘빽판’이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시대에 마구잡이로 찍어 낸 해적 음반인 빽판은 라벨이 컬러가 아닌 하얀 종이여서 백판이라 불렸고 그것이 된 발음으로 ‘빽판’이 된 것이다. ‘빽판’은 잡음이 적지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갈증에 비하면 그 정도 잡음은 문제 될 것이 없었고 그 잡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Queen의 ‘Bohemian Rhapsody’,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등, 수많은 명곡을 1987년 해금될 때까지 빽판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1980년대 빽판은 주로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서 만들어졌고 유통되었는데, 광주에서 빽판을 살 수 있는 곳으로는 충장로 5가 한일은행 뒤편에 있었던 금성레코드와 지금의 동부소방서 앞 대광레코드 등이 있었다. 특히 금성레코드 2층은 빽판만 진열이 되어 있어서 당시의 DJ들이 많이 이용했던 빽판의 성지였다. 금성레코드의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빽판을 고르러 가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구입한 빽판의 음질은 그야말로 복불복이었다. 좋은 음질의 것도 있지만 어느 것은 판이 튀기도 하는데 이때는 전축 바늘 위에다가 10원짜리 동전을 올려놓아 어느 정도 튀는 것을 막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LP는 85년 한해에 4백만 장이 생산돼서 최고조를 이뤘고 이후 CD(Compact Disc)에 밀려나서 1994년 말에 생산이 중단됐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LP는 가끔이지만 기획작으로 발매가 되고 있다.
그 많은 LP음반 중에 광주에서 만들어진 음반이 있는데, 1984년에 만들어진 ‘예향의 젊은 선율’이 대표적인 광주의 LP다. 이 앨범은 1977년 제1회 MBC대학가요제에 출전해서 동상을 받은 박문옥, 박태홍, 최준호가 ‘소리모아’라는 팀으로 참여했고, MBC대학가요제와 전일대학가요제 등 각종 대학가요제에 참가해서 입상한 김정식, 김종률, 신상균, 김원중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음반이다. 그중에서 김원중의 ‘바위섬’이 전국적으로 히트했다.
광주의 젊은 포크가수들이 만든 창작곡을 전국적으로 히트시킨 ‘예향의 젊은선율’에 이어서 1988에는 창작포크동아리 ‘꼬두메’의 음반이 발매된다. 이 앨범에서 히트곡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예술성이나 음악성을 인정받아 상당한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 음반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2024년에 발매된 광주의 프로그레시브 락밴드 ‘제4집단’의 음반이 참으로 오랜만에 광주에서 만든 LP로 등록되었다.
2, 3년 전부터 광주에는 LP를 접할 수 있는 업소가 속속 문을 열고 성업 중이다. 구시청 사거리 부근에 오래전부터 ‘라디오 스타’, ‘0518’이 있고 동명동에 ‘패러슈트’, ‘제플린’, 산수동에 ‘기역’, 쌍촌동에 ‘모나코’, 임동에 ‘대호’ 등이 있다.
최근에 동명동의 어느 LP카페에 들렀는데 오픈하자마자 MZ세대 젊은이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70, 80년대 충장로와 학원가, 대학가 등에 그 많았던 음악감상실, 음악다방을 부활시켜 광주 구도심권을 LP음악거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