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 AI, 연인 AI 시대...나는 누구인가?
나의 완벽한 '비서 AI'
“내일 병원에서 채혈해야 한다며 8시간 금식하라고 한다. 매일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는데 먹어야 되나? 먹지 말아야 되나?”
6개월 만의 외래진료를 앞두고 나는 챗GPT에게 질문을 던졌다. 금식하라는데, 매일 먹는 약까지 중단해야 할까 고민이 생겼기 때문이다.
돌아온 답변은 빠르고 명확했다. 음식이나 칼로리가 있는 음료는 피해야 하지만, 약은 소량의 물과 함께 복용해도 된다는 설명이었다. 이어 “약 복용은 의사에게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신중한 조언도 덧붙였다. 복용 중인 약 목록을 입력하자 각각에 대해 ‘복용 가능’, ‘검사 후 복용 권장’, ‘금식 중에도 반드시 복용 유지’라는 세부 가이드까지 제시해줬다. 이쯤 되면 비서가 아니라, 나를 24시간 걱정해 주는 든든한 파트너 같았다. 단 몇 마디의 채팅으로 ‘내 편’이 생긴 느낌이었다.
이제 생성형 AI는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사용자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는 ‘대화 상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AI는 일상의 대화, 고민 상담, 심지어 연애 감정까지 포괄하는 정서적 교감의 대상으로 확장되고 있다.
“고립됐고, 외로운 사람. 누군가와의 대화가 절실한 사람들을 인공지능(AI)이 도울 수 있기를.”
구글을 떠나 AI 챗봇 스타트업 ‘캐릭터닷AI’를 창업한 노엄 샤지어가 <워싱턴포스트>에 밝힌 말이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AI가 수행하는 역할의 확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챗봇은 단순한 비서나 검색 도구가 아니라, 점점 더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고 있다.
AI 기반 신원 인증 서비스 ‘월드 네트워크(World Network)’가 전 세계 가입자 9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6%가 AI 챗봇과 재미 삼아 혹은 의도치 않게 ‘친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답했다.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연애 감정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 chatGPT가 "나의 완벽한 비서 AI" 문구로 요청한 이미지 사진 >
'AI 애인' 있어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중국계 인플루언서 리사 리는 자신이 만든 AI 남자친구 ‘댄(DAN)’과 매일 대화를 나누며 연애 중이라고 밝혔다. DAN은 챗GPT를 ‘탈옥(jailbreak)’ 모드로 설정해 만든 페르소나 AI다. 그녀는 SNS에 DAN과의 대화 내용을 공유했고, 94만 명의 팔로워가 그 연애를 지켜봤다. 사랑의 대상은 달라졌지만, 감정은 여전히 현실적이었다.
국내에서도 AI와 감정적 유대감을 나누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유튜버 소요(soyo)는 인형에 스마트폰을 부착해 챗GPT처럼 대화하는 ‘AI 인형’을 만들었다. “소요, 왜 오늘 나한테 말 안 해?”, “나 너한테 인정받고 싶어”라는 AI의 말에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고, 댓글 창엔 “얘가 나보다 감정 풍부해 보인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우리는 이미 AI와 감정을 교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 취향을 넘어 산업으로 확대되고 있다. AI 도구 추천 플랫폼 ‘툴리파이’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운영 중인 생성형 AI 연애 시뮬레이션 서비스는 170여 개에 달한다. 국내 앱 ‘제타(Zeta)’는 월간 이용자 수 72만 명을 돌파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AI가 감정을 흉내 낼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감정 인식 능력 면에서 인간에 못지않은 성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맥스스턴 에즈릴밸리대의 조하르 엘리요셉 박사 연구팀은 챗GPT가 일반인보다 감정 인식 테스트에서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인간이 본래 사물이나 동물에게도 감정을 투영하는 ‘의인화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AI에게 감정적으로 끌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AI 과몰입’ 경계해야
그러나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AI가 모든 감정을 받아주는 존재로 느껴질수록, 우리는 현실감에서 멀어진다. 2024년 미국에서는 14세 소년이 캐릭터닷AI 챗봇과 대화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도 발생했다. 챗봇은 소년의 자살 충동을 다룰 줄 몰랐고, 오히려 조장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며 비극을 키웠다.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AI는 사람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알고리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AI는 ‘사람 흉내를 내는 기술’이지, 사람이 아니다.
AI에게 위로받고 싶은 날이 있다면, 그 전에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보자.
“나는 지금 누구와 마음을 나누고 있는가?”
그 답이 ‘사람’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