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기억하기
1980년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다. 부모님께서 운영하는 가게는 양동복개상가에 있었고 집은 누문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의 놀이터는 양동시장과 광주천, 충장로, 금남로였다.
#1. 5월 16일(금)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리는 민족민주화 성회를 봤다. 누군지 모르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연설 “계엄령이 확대되거나 … 하면 학교 정문에서 모입시다” 故 박관현 열사의 연설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대학생 형들을 따라갔다. 집으로 가는 방향과 같았다. 그들은 횃불을 들고 천변도로를 거쳐 유동방향으로 진행했다. 대학생 형들과 방패 든 방석복 경찰들은 나란히 걸어갔다. 평화로웠다.
#2. 5월 18일(일)
겁나게 더운 날이다. 금남로 4가 친구 집에서 놀다가 밖에서 뭔 일이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삼성생명 4거리다. 군인들이 몽둥이로 사람들을 때리고, 등에 메고 있던 분무기 같은 걸로 얼굴에 최루가스를 뿌리면서 잡아가기도 했다. 군인들이 트럭 위에서 사람들의 뒷머리를 잡아채면 사람들은 인형처럼 끌려 올려졌다. 소름 돋는 광경이었다. 거기에서 집까지는 500미터도 되지 않았다. 겁에 질려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광주일고 정문에서 군인들이 대학생들을 집단구타하고 있었다. 그날 광주일고 운동장에서는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체육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너무 놀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떤 군인이 자전거 앞바퀴를 걷어찼고, 어떤 군인은 얼른 집에 가라고 했다. 집에 왔더니 할머니께서는 위험하니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다.
#3. 5월 19일(월)
여기저기 총 든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피해 가면서 등교했다. 어수선한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오늘부터 휴교다. 다른 데 가면 안 된다. 바로 집으로 가라”고 했다. 선생님께 따로 여쭸다. “오늘 문화방송 ‘바르고 빠른 지혜자랑’에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송국 녹화는 일정대로 한단다. 우리 반 애들이랑 같이 가봐라”
우리는 월산동 무진중학교에서 광주공원, 충장파출소, 금남로를 거쳐 광주문화방송을 향하고 있었다. 군인들의 검문도 있었지만, 교복 입은 중3들이라서 그랬을까 별다른 제지도 없었고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방송국 앞, 총 든 군인들이 있었다. “오늘 방송 출연하러 왔어요” “오늘 방송 없다. 집으로 가라” 인생 첫 방송 출연은 무산됐다. 그러나 이때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제의 장면들이 스쳤다. 주변이 시끄러워지고 어디선가 사람들이 끌려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우리들은 군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중앙초등학교 육교 위에 있게 됐다.
끌려온 사람들은 장동로타리에서 전남여고 후문 앞 도로에서 큰 원형 대형을 이루었고, 무릎을 꿇거나, 원산폭격자세로 매를 맞고 있었다. 군용트럭이 나타나 사람들을 싣고 어디론가 떠났다. 옆을 봤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야지” 하셨고 같이 육교를 내려왔다. 중앙초에서 집까지는 1㎞ 남짓. 극한의 공포상황이었을까?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직도 생각나지 않는다.
밤늦게부터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와 함께 밤하늘엔 빨간 포물선이 그려졌다. 아마 공포탄이었을 것이다.
#4. 5월 20일(화)
아버지 모르게 집을 빠져나왔다. 방앗간 앞 총 든 군인이 없다. 어디로 갔을까? 동네 친구들 3명이 같이 다녔다. 금남로에 갔다. 어제와는 달랐다.
오후엔 버스나 트럭에 사람들이 타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우리도 태워달라고 했다. “너희 몇 학년이냐?” “중 3인데요” “안 돼” 다음부터는 “고1”이라고 했다. 태워주었다. 트럭 뒤에 타고 갈 때 “어느 고등학교냐” “광주일곤데요” “담임 선생님 이름은” 머뭇거리자, 그 형은 코카콜라 한 병과 보름달 빵을 주면서 내리라고 했다. 우리는 트럭에서 내려야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막냇동생은 5.18, 하면 큰형이 갖다준 콜라와 빵을 기억하고 있다.
오후 늦게부터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총소리 방향으로 갔다. 광주고속버스터미널 주변까지 가다가 돌아왔다. 유동사거리에서 광주역으로 가는 거리는 최루탄이 점령한 길이었다. 5월 18일 금남로에서 맡아봤던 최루탄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의 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골목 어귀에 할머니의 모습이다. 손자가 살아 돌아온 것에 안도하시던 모습으로 기억난다.
#5. 5월 21일(수)
그날도 너무 더웠다. 점심 때 즈음 친구들과 금남로로 갔다. 도청 쪽에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 뭔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기억이다. 철없던 우리들은 “트럭 타면 또 콜라 얻을 수 있을까?” 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중앙교회 앞에서 테니스공으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뛰었고 나도 뛰었다. 집단 발포였다. 총소리는 몇 차례 계속됐던 것 같다. 우리는 금남로 4가 붉은 벽돌 창고 사이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해졌다. 금남로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날은 거기까지다.
#6. 5월 24일(토)
도청 앞에 갔다. 분수대 위에서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뭔가 말하고 있다. “살인마 전두환, 김대중을 석방하라, 민주시민 궐기하라” 상무관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상무관은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다. 합기도 관장님이 가끔 데리고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놀란 광경이었다. 수많은 관이 상무관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아는 상무관이 아니었다. 사람이 죽으면 얼굴이 검게 변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부패를 막기 위해 뿌려 놓은 화학약품 냄새, 시체 냄새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금남로 여기저기 대자보가 있었다. 읽기는 했지만, 내용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명확한 기억이 있다. YMCA 옆에는 일본가옥, 선교사 집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 앞 인도 걸려있던 현수막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북괴는 오판말라.”
#7. 5월 27일(화)
이것은 착각일 수도 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차량으로 방송했다면 들었던 것이 맞다. 도청에서만 방송했다면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8. 날짜 미상
학교에 갔다. 우리 반 친구 한 명이 총을 맞았다. 선생님과 그 친구 집에 병문안을 갔다. 어디선가 날아 온 총알이 발등에서 발바닥으로 관통했다고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죽은 친구는 없었지만, 다른 학교에는 있다는 소문이 소리 없이 퍼지고 있었다.
부잡한 친구들도 많았다.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온 친구도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안에 심지는 주황색 밧줄이었고 파라핀이 발라져 있었다. M1 탄창째 가지고 온 친구도 있고 몇 발씩 가져온 친구도 있었다. 심지어 다이너마이트 하나에 총알 10개씩 바꾸는 일도 있었다. 선생님을 어떻게 알았을까? 갑작스러운 가방검사도 있었다. 언젠가는 광주천으로 노력 봉사를 간 적이 있다. 5·18 때 없어진 총을 찾는다는 것, 우리는 수풀을 헤치면서 총을 찾아다녔다. 한 자루도 찾지 못했다.
#9. 1981년 5월 어느 날
고등학교 연합써클인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했다. 가끔 대학생 형들을 만나기도 했다. 한상석(80년 당시 전남대 복학생 협의회 회장), 위경종(80년 당시 전남대 사범대 학생회장). 위대한 형님들을 알게 됐다.
5.18 1주기를 맞아 인성고 벽서사건으로 김용만 형이 구속됐다. 전남고에서는 시위가 있었고 양균화, 강병우 형이 구속됐다. 잘 모르는 형들이지만 서클 선배가, 그것도 고3 형들이 구속됐다니 충격이었다.
유동 아세아 극장 흥사단 단소는 뒤숭숭했다, 안기부 직원들이 밖에서 감시하니 출입할 때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분노하기도 했다.
#10. 1982년 10월 중순
고2 가을 82년 10월 중순쯤, 어떤 선배가 남동성당에 가보라고 했다. 故 박관현 열사의 장례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2년 전 그 목소리 주인공의 장례식이었다. 그 대학생 형이 옥사(獄死)했다는 것이다. 머리가 하얗게 된다는 느낌을 나는 안다. 잊고 있었던 나의 5.18은 재부팅되고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은 누구나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 5.18은 많은 이들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다. 군인이나 경찰이 되려고 했던 나의 대학생활은 5월 운동의 연속이었다. 지금껏 ‘살아있는 자의 의무’를 안고 살고 있다. 5.18 민중항쟁 45주년이다. “5월 광주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