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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_05 김피디의 불펀한 시선] 이토록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김태관| |댓글 0 | 조회수 127

5년 전,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처음 읽었다. 아들 녀석이 축구 교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던 시간이었다. 나는 푸른 인조잔디가 펼쳐진 피치 바깥에서, 무료한 시간을 누리는 호사 속에 생경한 여자 축구 에세이를 펼쳤다.


책은 작가가 우연히 발을 디딘 여자 축구의 세계에 관한 경험담이었다. 소설가 정세랑은 이 책이 축구를 통해 여성의 몸과 삶, 세계를 엮어낸다고 평했다. 생활 축구인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그 어떤 책보다 사실적이었고, 그 안에는 생활 축구팀 특유의 쓴맛과 단맛, 신맛과 매운 맛 문화가 고루 배어 있었다.


불현듯 떠난 강진 스완스 홈 경기 직관 여행

그 책을 읽고 언젠가 여자 축구에 관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5년 동안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정확히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광주FC가 7연패를 달리던 차에 전주월드컵경기장 대신 강진 영랑구장으로 차를 몰았다. 전남 최초의 여자 프로축구단 강진 스완스의 홈 개막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문 모르고 함께 길을 나선 가족들은 강진 반값 여행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나는 “잠깐 여자 축구만 보고 맛집도 가고, 영랑생가도 가자”며 어르고 달랬다.


< 강진 스완스 홈구장 영랑구장 주변 풍경 >


그렇게 도착한 경기장은 어느 군에나 있을 법한 종합운동장은 커녕 그 옆 자그마한 보조 구장이었다. 입구라고 할 것도 없이 어수선했고, 프로 경기 관람석이라 하기에는 민망한 나무 데크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웃음이 났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로 돌아간 듯한 풍경때문이었다.


무료로 입장하자마자 첫 어린이 손님이라며 과자 꾸러미를 건넸다. 팬들 대부분은 선수들의 가족이거나 관계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고장 축구팀을 응원하러 온 70·80대 어르신들도 적지 않았다. 그 어떤 K리그 경기장에서도 보기 어려운 구성이었다.


남다른 축구 관람 문화,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

어르신들은 심판 판정에 혀를 몇 번 차시더니, 이내 허허 너털웃음으로 팬심을 대신했다. 그중 한 어르신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그것이 머시 파울이여” 하고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90분 경기 중 단 한 번이었다. 가장 젊어 보이는 60대 어르신은 여자 축구를 몇 번 보셨는지 구수한 사투리로 입중계를 이어갔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골문을 향하면 “여자축구는 저런 것이 골이 된당께”라고 했고, 좋은 슈팅 기회가 지나가면 “와따, 거기서 쏴 부러야제” 하며 아쉬워했다.


< 강진스완스 어르신 서포터스와 나무데크 관람석 >


점잖게 앉아 계시던 한 어르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기는 언제 끝나는거여”라고 옆 어르신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났다. 90분 경기를 1:30:25로 표시하던 전광판만큼이나 예상 밖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늘 반, 직사광선 반. 엉덩이가 먼지로 얼룩지는 관람석은 불편했지만, 축구 직관 200회 인생에서 가장 낯설고도 정겨운 문화 속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비록 경기는 졌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경기는 리그 강호 인천현대제철을 상대로 홈팀 강진 스완스가 고전하는 흐름이었다. 약팀의 전형은 경기 중 골키퍼와 수비수가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마저 무너지면 대패로 이어진다. 다행히 강진 스완스는 국가대표 송재은과 손화연을 앞세워 나름의 스쿼드를 갖추고 있었다. 골키퍼 김예린도 든든하게 골문을 지켰다.


보통의 남자 축구는 메시나 야말 수준의 압도적 기술을 지닌 선수가 없다면 고도의 두뇌 게임이 펼쳐지는 바둑판에 가깝다. 그래서 거칠면서도 때로는 지루하다. 촘촘한 수비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만큼 세밀하게 움직이고, 공을 오래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강진스완스 홈 개막전 킥오프 >


그런데 여자 축구는 아기자기하면서도 다이내믹했다. 전술적 완성도가 균일하지 않은 만큼, 오히려 치고받는 공격 축구가 펼쳐졌다. 간혹 허무한 실수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 실수 덕분에 슈팅 수가 늘고 예기치 않은 기회도 열렸다. 현장의 몰입감은 더 커졌다.


이날 경기에서는 인천현대제철의 토리우미 유카가 단연 돋보였다. 작은 체구에도 어찌나 악착같이 뛰어다니던지 홈 팬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기술도 좋아 쉴 새 없이 강진의 골문을 위협했다. 이에 맞서 강진은 김예린 골키퍼의 선방으로 버텼고, 테크니션 송재은의 드리블도 보는 맛이 있었다.


경기는 아쉽게도 1대3으로 끝났다. 그래도 입장료, 아니 강진까지 온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의외의 꿀잼 경기였다. 무엇보다 경기 뒤 풍경이 오래 남았다. 선수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진짜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패배한 선수들에게도 우쭈쭈하듯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야유와 비판 콜, “정신 차려, 홈팀”에 익숙한 나에게는 작은 문화 충격이었다.


심지어 PC로 룰렛을 돌려 경품을 추첨하고, 당첨자가 경기장 밖 건물 2층 옥상에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은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팬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진귀한 쇼츠 콘텐츠였다.


강진 스완스의 첫 출발을 축복하며

여자 프로리그인 WK리그는 10월까지 팀마다 정규리그 28경기를 치른다. 현재 강진 스완스는 2승 1무 4패로 8개 팀 중 6위를 달리고 있다. 홈 개막전을 시작으로 매달 최소 한두 번씩 강진에서 경기가 이어진다. 우리가 잘 아는 지소연이 속한 수원FC위민도 강진을 찾는다.


낭만이라는 말로만 덮기에는 민망할 만큼 여건은 열악했다. 그래도 그동안 타 지역으로 취업해야 했던 우리 지역 여자 축구 선수들에게 강진 스완스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연고지 이전 끝에 강진에 터를 잡은 강진 스완스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구단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이곳에 와서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경기가 끝난 뒤 강진 읍내를 휘 둘러보며 반값 여행을 즐겼다. 며칠 뒤 돌려받은 지역 화폐로 구매한 산낙지가 집에 도착했다. 끝까지 현웃이 터지는, 아주 긴 여운이 남은 여행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여자 축구 기획안을 들고 지원 사업 발표에 나선다. 누구나 당당하게 에너지를 내뿜고, 동등하게 운동장을 점유하며 경쟁할 수 있는 여가 문화. 그런 일상의 스포츠 문화를 상상해본다.


설마 아직도 “여자가 무슨 축구야”라고 생각하는가.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이 누군가의 운동장을 좁히고, 끝내 밤길의 불안까지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편견과 닿아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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