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 소환하는 동학농민전쟁의 보국안민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물은 배를 뒤집기도 한다”
군주민수(君舟民水)는 순자(荀子)의 「왕제 王制」편에 나오는데 군주는 정치의 근본이 백성에게 있음을 알아야 하며 백성이 분노하면 군주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뜻이다.
2016년 박근혜 탄핵 때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24년에는 도량발호(跳梁跋扈)가 뽑혔는데 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행동을 의미한다. 도량은 장자의 “대들보 사이를 뛰어다니는 살쾡이처럼 함부로 날뛰는 행동이라는 것에서 유래하였고 발호는 『후한서 後漢書』에 통발에 갇힌 물고기가 사납게 날뛰는 것과 같다는 말로 권력을 남용하는 장군을 비판하는 예로 쓰였다.
2024년 12월 3일 현직 대통령의 기습적 비상계엄 선포는 6시간 만에 국회의 해제가 의결되어 실패로 끝났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치나 파시즘 정권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대착오적이며 퇴행적 행태로 민주주의 국가를 말살하려던 사건이었다. 이른바 12.3 내란 사건은 몸으로 막은 위대한 시민들의 저항으로 좌절되었다.
나는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 얼어붙은 땅 위로 쪼그리고 앉아 탄핵을 외치던 20~30대 젊은 여성들을 보면서 부끄러움과 비통함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키세스군단 혹은 ‘우주전사’로 불리던 그들에게서 한편으로는 새 희망을 보기도 했다. 동시에 130년 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전사’들에게서 이소사(李召史)를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학인물도(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 이윤영 구상, 박홍규 화백그림 ) 출처:동학혁명기념관
사진 중앙에 최제우, 우측으로 최시형, 손병희, 박인호, 손천민, 좌측으로 손화중, 전봉준, 김덕명, 이방언, 김개남, 뒷줄 중앙에 이소사 등이다.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으로 동학농민군은 재봉기하였고 우금티 패전 후 장흥·강진에서 또다시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3만 명으로 결집하여 관군,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이때 눈부시게 활약한 여자 장수가 있었으니 이소사라 불렸다. 소사는 과거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이다.
일본의 「국민신문」(1895년 3월 5일자)에는 이소사에 대해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고 나이는 22세로 동학교도로 장흥부가 불타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지휘하였으며 동학교도들이 신녀라 부르며 존경하였다”고 보도하였다.
1000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장흥관부로 쳐들어가 장흥부사 박헌양의 목을 쳤던 이소사는 1894년 음력 12월에 체포되어 문초로 살과 가죽이 진창이 되어 옥사하고 말았다. 그를 잔인하게 고문한 사람은 조선관리 백낙중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발발하였는데 그는 민영준을 매개로 해서 민비에게 7만 냥을 뇌물로 바쳐 매관매직으로 자리를 얻은 인물이다.
그러니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수탈하였고 이에 분노한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궐기하였고 그들 대부분이 동학교도였다. 고부에서 시작된 민란은 이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농민전쟁으로 확대되였다.
오랫동안 온갖 수탈과 부정부패를 일삼던 관리들의 악행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분노가천하를 진동시키며 불길처럼 타올랐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 각처에서 계속 진행되는 탄핵 시위와 오버 랩되는 광경이다.
1894년에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은 1895년 봄에 석대들 전투를 끝으로 여기서 대패한 3만명의 동학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사살되었다.
한편 녹두장군으로 불리던 전봉준과 김개남은 모두 측근의 밀고로 체포되어 죽었다.
그러면 동학농민전쟁을 유발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선 인물들은 어찌 되었을까?
고부군수 조병갑은 1년여 동안 당시 강진군 고금도에서 근신하는 척하다가 복권되었고 그 뒤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고등재판관으로 승진하였다.
이용태는 파직, 유배되었지만 1897년 사면받아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고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동학농민전쟁 때 교전했던 이두황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하고 잠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순종 즉위 후 귀국하여 전북 관찰사로 의병들을 살육했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도지사가 되었다. 이렇듯 반민족 반민중이었던 인물들은 결국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변신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이후 이들 외에도 많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권력과 부를 상속받아 기득권 세력으로 번창하며 그 뿌리를 내렸고, 또다시 친일 정확히는 반민족 매국 행위를 세습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일제에 항거하며 투쟁한 독립 영웅들을 지우는 작업으로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E.H.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에서 ‘역사는 과거 사건과 꾸준히 나타나는 미래 목표 사이의 대화’라고 하였다.
동학농민전쟁에서 그들이 내 걸은 슬로건 중 하나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즉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 2항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2025년 현재 무엇이 나라를 구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