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의 광주 최초를 찾아라] 동명동 최초마을 원촌 탐사
동명동은 광주광역시 동구 관할 법정동이자 행정동(10통61반)으로 약 43㏊(대지28.56) 면적에 2천368세대 3천491인이 살고 있다(2024년11월말). 65세 이상 인구가 1천35인이며, 독신 세대는 1천614다. 지난달 말쯤 연령별로는 20대 757인, 50대 462인, 60대 448인이다.
2024년 초 땅 필지는 1천707개다. 제곱미터당 최고 땅값은 240-15번지(중앙로 대인시장 건너 동편 로터리)로 288만7천원이며, 최저 땅값은 133번지(필문대로 서편)로 48만1천400원, 평균 땅값은 99만1천676원이다. 실거래 평당가는 178-5번지 459만원(22년6월2일), 207-22번지 723만원(21년10월26), 176-4번지 904만원(22년4월19일), 189-3번지 1천523만원(23년8월말)이다.
주요 기관은 중앙도서관, 동구종합복지관, 동구인문학당, 동명행정복지센터, 동명교회가 있다. 현재 동구청 등록한 요식업소는 343곳이다. 포탈검색에는 카페 123곳, 제과점 15곳, 사진관련 20여 곳, 편의점과 문집·목공·제재 각 10여 곳, 서점 6곳, 병·의원 6곳, 교회와 금융 각 3곳과 2곳이다.
집단주거·숙박처는 센트럴파크오피스텔, 쥬네센트로오피스텔, 1980년대 선 동명아파트와 동명파크맨션, 오아시타호스텔과 리버호텔, 원룸·고시원 25곳과 편의점 10점, 나무전거리통 목공·문집 열집, 온라인 언론 플레이광주와 출판사 엔터, 옛 금호문화회관도 있다.
최초 동명동(東明洞) 호칭 날은 1946년 4월 5일이다. 1930년 동계(東溪)가 동정(東町)이 됐다. 조선시대 광주 읍성 동문 밖, 제비냇가(鷰川) 길목촌인 편방면(片坊面) 원촌(院村)이 토박이 동네다. 20세기 초 두방면(斗坊面)을 거쳐 1914년 서방면(瑞坊面) 동계리에 속한다.
1915년 사정(査定)때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 지적원도를 보면 779필 중 대지 139개, 전 419개, 답 205개, 임야 1개, 잡종지 2개, 묘지 13개다. 지금 지산동과 장·서석동 일부도 포함된다. 최초 땅매김(地番)부여 토지대장 동리에 ‘원촌리’로 적혀있는 땅은 12만여 평이다.
현 동명동 범위에 집터(垈地)는 1910년대 39개 9천938평이다. 1930년 4월 새로 매긴 50번지 일대 동계천로 북편 원촌마을에 36개 5천387평, 200번지 감옥 3천394평, 243번지 720평, 170번지 446평 네 뜸이다. 한국인 성씨는 김(金) 11, 이(李) 6, 임(林) 3, 신(申) 2, 강(康)·공(孔)·노(盧)·박(朴)·유(劉)·양(梁)·정(鄭)·천(千) 각1이다.
국적별로 보면 한국인 30필지 3천614평, 일본인 8필지 2천930평, 국(國) 1필지다. 사쿠마(佐久間時三郞)는 73번지(711평)에 주소를 두고, 75번지 과수원 5천510평을 포함 7천274평을 가졌다. 79번지 스가(管彌三郞)는 1만여 평, 40번지 스기우라(杉浦錠之助)는 18번지 5천359평 포함 6천843평을 보유했다.
부재지주로는 금남로1가 삼평조와 관련된 히라츠카(平塚嘉右衛門)는 23번지 1만3천671평 포함 1만9천2평, 도미다(富田德太郞)가 6필지 5천318평을 소유했다. 한국인은 부동정 이응일(李應逸)이 209번지 4천424평 비롯 4천911평, 성저리 임계(林溪)가 207번지 논 4천669평 임자다.
자드락 근교 농촌은 1930년 여수가는 철길이 놓이고, 도시화로 관료 사택과 형무소통이 됐다. 143번지는 1923~1930년 전남공립사범학교, 전대수의병원 흔적, 교육과학관·연구원·과학고가 있었다. 최근 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 ‘동리단길’ 별칭이 생겼다. 확연 문화품격터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