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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람들은 1980년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서해숙| |댓글 0 | 조회수 164

1980년 5월, 거대한 격랑이 광주를 휩쓸고 지나갔다. 총성과 함성이 거리를 뒤덮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 시간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광주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일을 겪었고, 또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의 경험은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서로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는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을 목격했고, 누군가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거리를 헤맸으며, 누군가는 일상의 길 위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과 마주쳤다. 그러나 5·18의 기억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은 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말과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올해로 45주년을 맞는 5·18을 기리며, 필자가 광주 시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구술 사례를 통해 그날의 시간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 도청으로 향하는 계엄군의 탱크,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 >


◆ <광주대 앞에서 목격한 5·18>, 최○○(남, 1940년생),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 2018.4.12. 현지조사



큰 피해는 없었는데 여러 가지로 혼란은 있었제. 진짜 나 같은 경우에는 참 위험한 꼴 당했어요. 내가 내 자신을 반성을 하는데, 그때 인자 시내가 마비가 되어붔잖아요.


그러니까 시골에 뭔 물건을 좀 팔아볼라고 갖고 갔어요. 작물을 재배해갖고. 그래갖고 시내를, 바로 팔고 나오다가 계엄군하고 저 그니까 저 데모군{시민군}허고, 군인허고 전쟁이 붙어불었어.


그 자리가 바로 광주대 앞에서 쏘가{난리가} 나분거여. 그래 이제 우리는 죄도 없으니까 무조건 도망간 것이 집으로 도망갔제. 집으로 가서 숨어 이불을 둘러쓰고 있는디 총알이 날라와. 방으로. 누워있는디.


@2조사자 : 여기 앞?

아니, 저 광주대 앞에.

겨의 그래서 다 끝나니까 전부 인자 방을 수색하고 다니드만.


[총을 잡는 시늉을 하며] 총을 대고 손 들으라고 나오라고 그래. 긍께 손 들고 나갔제. 근데 젊은 놈들은 다 잡아가고 나이 먹은 사람은 놔주드만.내가 그때 죽을 고비를 한 번 당한 거야.


그거이 내가 좀 아쉬운 것은 좀 무모했어. 데모원들이.

경찰들이 이렇게 저, 저 군인들 차가 막 차고 나오니까 거기다 총부리를 대분거여. 그래 거기서 아마 일어나분거여 전쟁이.

그래갖고 사람 많이 죽었어. 그때. 바로 그 광주대 바로.

이 이야기는 제보자가 5·18 당시 농작물을 팔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가 광주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상황을 목격한 내용이다. 그는 총격이 벌어지자 남의 집으로 피신했지만, 계엄군이 그곳까지 수색하러 들어왔다고 했다.


총을 겨눈 군인들 앞에서 손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풀려났고, 그 순간을 "죽을 고비"로 기억하고 있었다. 구술자의 말속에는 당시의 공포와 혼란,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폭력적 상황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함께 담겨 있다.


< 도청 앞에 앉아 있는 계엄군들과 헬기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 >


 <5·18 때 겪은 이야기>, 윤○○(여, 1937년생),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 2018.4.12. 필자 현지조사



< 음성 출처 :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바로가기 >


지원동쪽에서 군인 차가 한 7~8대가 온 디다가{곳에다가} 계엄군 차가 한나 가면서 쏴블드라고. 그렁께 완전히 [양손을 쎄게 맞부딪히며] 붙어불었지. 나도 그때 당했어라 거그서.


#청중 : 이 양반도 당했어.

아, 나는 우리 아들 행적을 모른께 쩌 동명동 일대를 다 더듬고 댕겼어, 하숙집을. 그 자취생 하던 데을 다 더듬고 댕기다가 인자 알았어.


인자 알아논께 안심허고 도청으로 가본께, 도청에 워~~메 트럭에다 관을 짜갖고 도청으로 가는디 갔어요. 또 혹시라도 아는 사람 죽었는가 볼라고 갔더니, 전부 개만이로{개처럼} 끄집어다 놓고 줄줄허니 놓고 찾은 사람은 관에다 담아놓고 태극기를 덮어놓고 분향하라고 그래. 도청 직원인가? 그 행정에서 나왔는가, 분향하라고 하면서 묵념하라고.


그래서 다~ 봤어. 그리고 명단 보고 그래도 아는 사람은 없어. 그래서 거그서 도로{다시} 인자 걸어온단 말이요 진월동으로. 진월동 거그 거 오리탕집에, 포충사 진월동 그 옥천사 바로 옆에 오는디. 헬리콥타가 뱅뱅뱅 돌더니 지져대{총을 연속 발사해}.


인자 줄줄이 걸어오는디, 글안해도{그렇지 않아도} 자전차 타고 오다가 연산 아짐을 만나갖고 그 양반이랑 걸어서 와. 인자 양동 장에 갔다가.


근디 총을 쏜께 그냥 할 수 없이 그 여관 골목으로 들어가서 변기 옆에가 이러고{몸을 수그려 엎드리는 시늉을 하며} 있었제. 옥동양반이랑 나랑 여산댁이랑 모다{모두}.


그래갖고 조용해서 나온께 군인들이 나와 갖고 빨리 들어가랑께 어디 들어가서 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갔어. 인자 후문으로 해서. 그리{거기로} 들어가 갖고 있은께, 오~메 애기한테 쏴불었어. 애기를 업고 그 학생을, 초등학생을 업고 막 지나가. 병원으로 가니라고. <중략>


예, 봤어. 헬기가 이렇게 [오른손을 허공에서 크게 저으며] 타고 다니면서 보고 막 군인들이 한 7~8대가 나온 디다가 계엄군이 가드라고요. 그래서‘니기들{너희들} 죽었다, 뭣허러 가냐.’그랬어. 그더니{그러더니} 겁 없이 거기서 지져댔든가비여. 그래갖고 그것들 거그서 죽은 놈을 헬리콥터가 가라앙거갖고{내려와 가지고} 싣고 가붔는가 금세 없어져붔대요. <중략>


그래갖고 와서 보믄 인자 낮에, 저녁내 그 아시아 자동차 차들 돌라갖고{훔쳐서} 기계차에다 줄레줄레 싣고, 저 다리에서 그냥 떨어져서 갈아불고 고러고 댕겼어라 그 사람들.


그래서 거그서도 많이 죽었어. 떨어져서, 차에서 떨어져갖고. 기계차라 줄레줄레 [양팔을 벌려 좌우로 흔들며] 옆에 막 타갖고. 자동차도 아니고. 그래갖고 나중에 가서 봉께 그 머리빡을 차바퀴가 갈아불고 가갖고 바쿠에{바퀴에}. 차를 놔두고 가불었는디, 인자 [양손을 둥글게 돌리며] 바쿠에가 머리카락이 옴빵 빠져 붙어갖고 있드라고. 그때 난리쳤어.


우리가 그때 걸어갈 때도 어쩐지 알아요? 군인들이 거리거리 조사허고. 시내 할 일 있은께 간다고 하고 갔제. 그래갖고 그리고 여그서 가믄 저그, 지금 거가 연탄공장 앞에 조금 가믄 거가 그 시내에서 변소 퍼다 붓어 논 통이 큰 것이 있어요.


근디 지금 꽃밭 맨들어갖고 거가 묻혀불었어. 거그다 송장들 많이 넣어불었다 했어. 요 효촌 연탄공장에서 쪼끔 가믄 거가 이렇게 널른디{넓은곳에} 꽃밭 있어. 거가 탱크를, 이렇게 황토 받아 논{놓은} 놈에다가 죽여서 모두 넣어불었다 혀.

예, 예. 글로{거기에} 한나{가득} 찼다했어. 응, 어찌 갖다 넣어불었던지.


#청중1 : 그때 그랬어. 근닥했어{그런다고 했어}.

#청중2 : 그때 많이 똥통에다 많이 넣어붔다. 그랬어. 그 소문이 났어.

두 번째 이야기는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제보자의 아들은 당시 전남도청 근처 동명동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제보자는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동명동 일대의 하숙집과 자취방을 하나하나 찾아다녔고, 아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도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트럭에 실려 온 관들과 줄지어 놓인 시신들, 태극기로 덮인 주검과 분향소의 장면을 눈으로 보았다.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공포는 이어졌다. 진월동 옥천사 부근에서는 헬리콥터가 선회하며 총을 쏘는 장면을 보았고, 총격을 피해 여관 골목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다. 제보자는 아이를 업은 채 총에 맞은 장면, 차에서 떨어진 사람들의 참혹한 흔적, 그리고 연탄공장 근처 분뇨통에 시신을 버렸다는 소문까지 이어서 구술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목격담이라기보다,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가 귀갓길 내내 마주한 5·18의 참혹한 풍경을 보여준다.


도청 앞 광장에 희생자들의 관을 옮기는 유가족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 >


 <5·18 때 바람 모퉁이의 시신들>, 남○○(여, 1943년생),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내남동 내지마을, 2018.6.27. 필자 현지조사



< 음성 출처 :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바로가기 >


그래서 인자 마늘을 뽑아다가 요만치썩 요만치썩 묶어갖고 인자 그놈을 한 보따리 해갖고 인자 이고 갔어요. 갔는디 ‘바람모퉁이’라고 주남 앞에, 바람모퉁이를 나려간디. 거시기 내가 나려가서 거그 무구와서{무거워서} 거그, 지구어매랑 누구랑 쉬었든가 쉬어갖고 요로고 있는디.


우리 성님이, 우리 친정 성님이, 큰집 성님이, 우리 큰 성님이 뭔 짐차에서 ‘쿵’ [양손을 내리치며], 인자 누가 내린지도 몰랐는디.

“오메! 애기씨~”

그래. 그래서 봉께 우리 성님이여. 큰집 성님, 친정 큰집 성님. <중략>


“애기씨, 여기다 소매{소변} 조까 보고 가야쓰겄네.”

그래서 인자, “글믄 거그서 소매 보시요.”

인자 그랬더니 우리 성님이 [바지내리는 시늉을 하며] 앉도{앉지도} 안 하고 요로고 [상체를 숙이며 엉덩이를 들고] 엎져서 소매를 본디, 꺼적데기가 막 덮어져갖고 있어.


#청중 : 사람을, 죽어서 다 덮어놨어.

모르고 우리 성님은 인자 엉덩이를 거기다 두르고 오줌을 싼디 쉬포리가 붙었든가 웅덩, 웅덩 날러가드라여. ‘윙’허고 쉬포리가. 쉬포리가 윙 윙 했쌌드라요. 아이, 그래서 요렇게 돌아다 봉께 꺼적데기가 다 덮어져갖고 있어. <중략>


아이! 그래서 봉께 어떤 놈은 외당목으로 덮어놨어. 당목으로. [생각이 얼른 안 나는지] 거, 거 뭔 공장? [옆에 있는 청중을 보며] 베짜는 뭔 공장? 그 공장에서 인자 가다가 죽어분 사람.


#청중 : [청중이 생각났는지] 도시공장.

도시공장이다우~. 응, 방직공장, 방직공장. 그래 맞어! 거그서, 거그 일 댕기다가 와서 죽은 사람은 거그 베를 막 찢어서 막~ 덮어놨드만. 당목으로 당목으로 잉. 찢어서 덮어놨는디.


어떤 사람은 애기를 뱄는가 배가 요만해. 인자 봉께 배가 요~로~코 [양손으로 만삭인 배를 만들며] 불러갖고 있어. 긍께 그 사람은 애기가 들었는갑닥해.


긍께‘오메, 애기가 얼마나 저 속에서 뭐시기 했으까? 어매가 죽은께 얼마나 뭐시기 해갖고 뒤떠불었을까?’하고. 사람들이 외당목으로 덮어놨는디, 그냥 배가 요래갖고 있고. 아이고, 꺼적데기를 봉께 밑에, 그 밑에가 다~ 송장이네. 나중에 우리들이 정신차려갖고 봉께. <중략>


인자 그러고는. 아이 그래서 봉께 늘~~편이 [양팔을 넓게 펼치며] 다 송장이여. 쩌 건너도 봉께, 외당목을, 당목으로 다~ 덮어놓고. 아조, 천지가 송장이드랑께. 거가. 천지가.


#청중 : 공수부대들이 쏴 불어서 그래. <중략>


찾아갔다고. 인자 끝나고, 여 광주사태가 끝나고. 다 당목으로 덮어 논 사람들은 뭐이다냐 헝께, 그 아까 도시공장 거그 댕김서, 거그 댕긴 사람들이 걍 차를 타고 가믄 걍 툭툭툭툭 떨어져서 죽으믄 질질 끄집어다가 거그 한쪽에, 그때는 논, 거가 논 밭이었어.


긍께 거그다 끄집어다 내불고 그랬든가. 근디 요로고 깨골창에도, 차 댕긴 너메 깨골창이드만. 그 깨골창에도 다~~ 가마데기 질{길}~~게 해갖고 그것을 다 덮어놨어. 그것이 다~ 송장이다 허드랑께. 아이고매! 나 별 것을 다 봤당께. 다 봤어. <중략>

세 번째 이야기는 마늘을 팔러 가던 길에서 마주한 참혹한 장면을 담고 있다. 제보자는 밭에서 거둔 마늘을 이고 시내로 나가던 중 '바람모퉁이'에 이르렀다. 잠시 쉬어 가던 중 함께 가던 친척이 소변을 보러 간 곳에 거적이 덮여 있었고,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 아래에 시신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보자는 거적과 방직공장의 당목으로 덮인 시신들, 그리고 그 가운데 만삭으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구술자의 말 속에서 매우 강렬하게 되살아난다. "천지가 송장이드랑께"라는 표현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그 순간 제보자가 느꼈던 충격과 공포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길 위에서 마주한 5·18'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구술자는 농작물을 팔러 시내에 나갔다가 광주대 앞의 총격전 상황을 목격했다. 두 번째 구술자는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동명동과 도청 일대를 찾아다니다가 당시의 참혹한 장면들을 보았다. 세 번째 구술자는 마늘을 팔러 가던 길에 시신들이 놓인 현장을 마주했다.


이처럼 광주 사람들이 들려주는 5·18 경험담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농작물을 팔러 가던 길", "아들을 찾으러 가던 길", "마늘을 이고 시내로 가던 길"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동선 속에서 기억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이야기들은 더욱 생생하다. 역사책 속의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던 누군가의 일상 속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폭력과 공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경험담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경험이 기억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물론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경험담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사실에 기대어 말한다. 따라서 구술자가 어떤 장면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기억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그 장면을 다시 말하는지가 이야기의 힘을 결정한다.


또한 구술 이야기는 단순한 사실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는 구술자 개인의 생각과 판단, 정서가 함께 담긴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강조되는 장면이 달라지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감정의 결도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경험담은 사실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서사이기도 하다.


광주 사람들에게 5·18은 '공동체적 기억'이라 할 수 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총성을 들었고, 누군가는 가족을 찾아 헤맸으며, 누군가는 시신이 놓인 장면을 보았다. 그 기억은 개인의 것이지만, 동시에 광주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공유되어 온 기억이다.


물론 개인의 경험담은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직접 겪은 일이기에 그 말은 매우 생생하다. 구술자의 말투, 사투리, 몸짓, 반복되는 감탄과 탄식 속에는 그날의 공포와 충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이야기판에서 청중들이 중간중간 호응하고 자신의 기억을 보태는 장면은, 이 경험담이 한 개인의 말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함께 기억하고, 함께 확인하며, 함께 공감하는 과정이다.


지면 관계상 몇몇 사례만 제시하였으나, 광주 사람들이 들려주는 5·18 경험담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를 살아낸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며, 공동체가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경험과 기억에 기초한 이야기는 한 개인이 무엇을 겪었는가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공동체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말하며, 어떤 의미로 전승해 가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5·18에 대한 구술 기억은 바로 그런 점에서 소중하다. 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말은 시대를 건너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묵직한 공감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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