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칼럼] 세계는 연구소로 경쟁한다 – MIT, ZKM, IRCAM에서 배우는 CT의 미래
문화기술(Culture Technology, CT)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계의 연구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CT가 단순한 기술 융합이 아니라 ‘창의성과 감성, 예술성과 과학기술이 융합된 집단지성의 실험장’이라면, 이미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실험이 오랫동안 진행되고 있는 기관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MIT 미디어랩, 독일의 ZKM, 프랑스의 IRCAM, 일본의 ATR이다.
MIT Media Lab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넘어 인공지능, 로봇, 인터페이스, 디자인, 사운드, 인류학, 심리학까지 아우르는 ‘학제간 창의 실험소’다. 1985년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와 시모어 페이퍼트에 의해 설립된 이 연구소는 “실험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곧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교수, 학생, 기업, 예술가가 수평적으로 협력한다. 이들은 스마트 의류, 감성 인터페이스, 소셜 로봇, 데이터 시각화 등에서 혁신적인 결과물을 내며 전 세계 연구소의 모델이 되었다.
ZKM(Zentrum für Kunst und Medientechnologie)은 독일 카를스루에에 위치한 예술-기술 융합 연구기관으로, 박물관, 전시관, 레지던시, 연구실이 통합된 ‘문화기술 복합지대’다. 여기서는 예술가, 기술자, 큐레이터, 디자이너, 사회학자, 철학자가 함께 협업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구현한다. ZKM은 기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실험적 창작이 가능한 공간으로, CT의 철학적 지향점에 가장 가까운 실례 중 하나다.
IRCAM(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 위치한 국립음향음악연구소로, 음악과 음향기술, 인터페이스, 작곡 소프트웨어, 실험적 퍼포먼스 기술 등을 개발해 왔다. IRCAM은 예술가와 과학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대표적 기관으로, 예술가가 직접 기술 연구에 참여하고, 연구원이 무대 위에서 창작 실험에 나서는 융합형 연구 생태계를 실현하고 있다.
이 세 기관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 중심이 아니라 ‘창의 중심’이라는 점. 기술은 수단이고, 창의와 감성이 중심이라는 구조다. 둘째, 공공성과 개방성이다. 이들 기관은 모두 정부 지원을 받지만, 기업·대학·예술계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산업화도 병행한다. 셋째, 융합 인재 육성 기능을 내포한다. 연구소는 동시에 교육기관이자 창작 공간이다.
그렇다면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 지향해야 할 모습은 무엇인가? 단순한 실증 중심의 기술개발 기관이 아니라, CT라는 복합 개념을 구현하는 공공 창의 실험소(Public Creative Lab)여야 한다. 예술가가 연구실에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공학도가 전통문화의 미감을 디지털로 해석하며, 인류학자와 디자이너가 협업하여 UX 설계를 주도하는 구조여야 한다. 한국의 문화기술이 전 세계에 존재감을 가지려면, 이처럼 ‘혼합된 정신’을 제도화할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한국은 높은 기술력과 문화감수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통합해 내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 ZKM이 독일 연방정부의 문화부와 과기부의 공동 지원을 받으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IRCAM이 프랑스 문화부 산하에서 국립음악예술연구기관으로 법적 지위를 가지는 것처럼, 한국문화기술연구원도 이중부처 협력체제와 법제적 기반을 함께 구축해야 한다.
민간 기술기업과도 적극 협업해야 한다. MIT Media Lab이 삼성, 구글, 소니와 긴밀히 협력하며 기술을 상업화하는 동시에 공공 가치를 놓치지 않았던 것처럼, 한국 CT연구원도 메타버스, 게임, 엔터테인먼트, XR 기반 전시, 문화유산 디지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계되어야 한다.
결국 CT는 미래의 삶을 실험하는 ‘공공형 연구 인프라’이다. 그것은 단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사회와 예술, 사람의 감정을 함께 끌어안는 창의 거버넌스다.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이 ‘기술의 공장’이 아닌 ‘상상력의 연구소’로 출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