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광주 > 웹진 『플광24』 > [제2회 칼럼] 문화기술, 기술인가 문화인가? – 정체성 논쟁과 제도적 함정

웹진 『플광24』


[제2회 칼럼] 문화기술, 기술인가 문화인가? – 정체성 논쟁과 제도적 함정

김혜선| |댓글 0 | 조회수 122

문화기술(Culture Technology, CT)은 단순히 '기술에 문화가 접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과 예술, 데이터와 감성, 산업과 문화가 하나의 통합 생태계를 형성하는 21세기형 융합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 현실은 아직도 "기술인가, 문화인가"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 있으며, 이로 인해 CT의 정책화, 제도화, 재정지원은 항상 한계를 맞아왔다.


문화기술의 출발점은 김대중 정부 시절, '디지털문화콘텐츠'를 국가 신성장동력으로 삼았던 데에 있다. 이후 노무현 정부가 이를 국가전략기술(6T) 중 하나로 지정하며 CT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정책 담론에 등장했다. 그러나 CT가 포함된 다양한 정책 문건에서도, 이를 '문화콘텐츠 기술', '예술 기술', '감성기반 인터페이스 기술', '융합 기술' 등으로 정의한 바 있어, 여전히 통일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정체성 혼란은 법제도와 연구개발 체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CT R&D 과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공학 중심 R&D 평가 시스템에서는 정량적 효과 산출이 어렵고, 문체부에서는 기술적 전문성이 부족해 실질적 기술성과에 대한 평가가 곤란하다. 이로 인해 현장 연구자들은 '양쪽 모두에서 소외'되는 상황에 처해왔다. CT전공자들은 융합형 인재로서 기획, 예술, 기술을 두루 이해하지만, 평가 시스템은 여전히 공학자 혹은 예술가 중 하나로만 분류하려 한다. 이로 인한 정책 실효성 저하는 매우 크다.


또한 법제적 정체성의 불분명성도 문제다. CT는 과기정통부 소관의 국가R&D 범주 안에도, 문체부의 문화산업 진흥법령안에도 명확한 주도권이 없다. 2012년 개정된 『문화산업진흥기본법』에서는 "문화기술 연구기관 지정 및 육성"이 명시되었지만, 구체적인 기능, 권한, 예산 운영 방식 등은 여전히 부처별 혼선 속에 미비한 상태다.


국외 사례를 보면, 프랑스의 IRCAM은 예술과 공학을 동등하게 바라보며, 국립음향예술기술연구소로써 법제적, 재정적으로 독립된 지위를 갖는다. 미국의 MIT 미디어랩은 명확히 학제 간 융합을 전제로 교육-연구-산업화를 통합한 모델로, 애초부터 복수 학문 간 실험이 전제된 구조다. 한국의 CT는 이와 달리 아직도 문체부와 과기정통부 사이의 정책적 회색지대에 존재하며, 이는 CT가 '중장기 전략'이 아닌 '단기 사업'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CT정책의 혼선은 결국 연구자와 기업 모두에게 '불확실성'을 남긴다. 어떤 사업은 과기부 예산에서 나오고, 어떤 사업은 문체부 예산으로 진행되며, 연구자의 직군은 콘텐츠 기획자냐, 시스템 엔지니어냐, 창작자냐에 따라 분절되어 있다. 이로 인해 CT 관련 스타트업이나 융합기업들도 정부 지원 체계에 접근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대학원 수준에서 배출된 CT 융합인재들이 갈 곳이 없어 산업 외 전환, 프리랜서 창작자, 해외 진출로 이어지는 현상은 그 단적인 증거다.


이제는 CT를 단일 분야가 아닌 '융합 그 자체'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반영한 새로운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CT는 감성과 창의성을 과학기술 기반 위에서 실현하는 고차원의 융합 기술로, 인공지능, 실감형 콘텐츠, 감성인터페이스, 메타버스, 전통문화 디지털화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이를 위한 정책은 단일 부처에서 다룰 수 없다. 문화기술은 국방기술이나 생명공학처럼 '복합 거버넌스 체계'가 전제되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은 이 정체성 문제를 제도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예술과 공학, 인문과 데이터, 문화와 시장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체계가 필요하며, 이를 실현하려면 정부는 CT의 융합적 속성을 인정하고, 관련 법령과 예산, 조직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단지 "어디 소속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협업하고 연계할 것인가"가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CT는 미래 문화경제의 근간이며, 문화기술을 둘러싼 제도와 정책이 지금처럼 머뭇거린다면, 한국은 콘텐츠 강국에서 기술 의존형 수입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 정체성을 바로 세울 마지막 기회다.


0 댓글


카카오톡 채널 채팅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