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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숙 - 견훤 이야기에 담긴 광주사람들의 희망과 좌절

플레이광주 0 260 01.23 10:19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용모와 몸가짐이 아주 단정하고 어여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그 딸이 아버지에게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찾아온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딸에게 긴 실에 바늘을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둘 것을 당부했다. 그 날도 밤에 남자가 찾아오자 딸은 그 말대로 하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 그 실이 간 곳을 따라가 보니 바늘은 큰 지렁이에 꽂혀 있었다. 이로부터 딸은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칭하였다.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견훤 탄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견훤은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를 세웠던 왕이다. 역사 기록에는 견훤은 원래 지금의 경북 문경시인 상주 가은현 사람이라 하는데, 어찌하여 이야기 속에서는 광주사람이 되었는지? 그 당시에는 호적 세탁을 이렇게 했던 것일까?

견훤은 역사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망하기 전까지 전라도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한 아주 잘나가는 인물이었다. 순천의 박영규를 사위로 맞이하여 자신의 세력을 튼튼히 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에서 후백제라는 국가체제의 기틀을 견고하게 쌓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도 출신이 아닌 경상도 사람인 견훤은 광주사람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일개 왕이라면 출생부터 남달라야 했기에, 자신의 출생을 신비롭게 꾸미고 치장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이한 출생과 이력을 갖게 되면 광주사람들도 분명 자신을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기에, 그는 광주 북촌의 딸과 밤마다 찾아오는 신비로운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이야기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 속의 남자의 정체는 용이 아닌 지렁이였으니. 전 세계적으로 나라를 건국한 왕들 중에서 이렇게 초라한 탄생 이야기를 가진 왕이 있을까 싶다.

왕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라든가 알에서 태어나든가 용을 아버지로 두든가 했어야 했다. 그런데 하필 그 흔하디 흔한 지렁이가 아버지가 되어 견훤은 졸지에 지렁이 자손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왕건과 안동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신이 왕건에게 투항하지 않았어도 그는 여전히 지렁이 자손이었을까? 견훤은 스스로 왕이라 한만큼 지렁이 자손이 아니라 용의 자손이어야 했다. 그래야 최소한의 명분을 가지고 광주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고려 태조 왕건이 용의 자손이라 홍보하며 세력을 확장하던 차에, 전라도에서 용의 후손이라 외치는 견훤을 가만히 둘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이후 자식들에게 배신당하고 고려에 투항하는 마당에 말이다.

 

역사적으로 패배한 견훤은 더 이상 신비로운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역사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라를 세운 왕이었을지라도 왕이 갖는 최소한의 존엄마저 존중될 수 없었기에, 결국 지렁이 자손이 되어 역사의 바닥에 내팽개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견훤을 지렁이 자손으로 만든 사람은 고려 왕조가 아니라 광주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견훤이라는 용맹한 장수가 왕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광주사람들에게 무한한 꿈과 희망 그리고 이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사람들은 견훤을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주사람들은 스스로 열광하며 신비로운 그의 탄생 이야기를 읊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견훤이 고려에 패망하는 모습을 본 광주사람들은 그들이 꿈꾸던 세상이 끝났음을 좌절하고, 그 미움과 증오가 오버랩 되면서 견훤의 탄생이야기를 비틀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천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광주에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찾아와서 광주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마련하려 한다. 옛날 경상도 출신인 견훤이 전라도 일대를 휘젓고 다닌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견훤이 광주사람들에게 외쳤을 이상과 희망의 메시지를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외쳐대고 있다. 시간이 흘러 세상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광주사람들은 좌절을 이겨내고 또 다시 꿈과 희망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역사 속에 초라하게 사라진 견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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