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지나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이름과 작별 없는 기억
4월이 오면, 우리는 다시 제주 4·3 사건을 떠올린다. 봄은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그 봄이 품고 있는 기억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스치는 자리마다 이름 없는 목소리들이 아직 남아 있는 듯하고, 꽃이 피는 시간 위로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시간들이 겹쳐진다.
그렇게 반복되는 추모의 계절 속에서 우리는 다시 같은 물음 앞에 선다. 과거는 어디까지 기억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이 비극적인 역사와 작별할 수 있는가. 아니, 작별이라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일까.
최근 2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 <내 이름은 My Name>과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가선다. 하나는 ‘이름’을 통해 잊힌 존재들을 다시 불러내고, 다른 하나는 ‘작별할 수 없음’을 통해 4·3이 여전히 현재형의 시간 속에 놓여 있음을 증언한다.
이름, 존재를 붙드는 마지막 닻
영화 <내 이름은>에서 '이름'이라는 문제는 단순한 서사 장치를 넘어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은 인간이 ‘이름’이라는 상징 질서 속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주체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이름은 단순히 불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특정한 존재로 ‘만들어내는’ 작용을 한다.
우리는 사람을 기억할 때 여러 이야기를 붙인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 그 이야기들은 흐려진다. 끝내 남는 것은 이름뿐이다.
솔 크립키(Saul Aaron Kripke,1940~2022)의 말처럼, 이름은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강직한 지시어다. 어쩌면 이름은 존재의 가장 마지막 자리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끝까지 남아 그를 붙들고 있는 하나의 닻인지도 모른다.
영화 <내 이름은>의 주인공은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으로 그의 이름은 여자 이름인 '영옥'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이름이 부끄러웠고,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며 살아왔고, 왜 부모님이 자신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에 얽힌 내력을 추적하며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가운데 1948년 제주, 4·3 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드러낸다.
영화 속 아들은 묻는다. “이 이름, 나 아니야. 바꾸면 안 돼?” 남자인 자신에게 붙여진 여자 이름 '영옥'은 그에게 부조리한 굴레이자 부정하고 싶은 정체성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하다. “그 이름은 그냥 붙인 게 아니야.”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 죽음의 문턱에서 아이를 살려내려 했던 부모의 절박한 염원이 담긴 '생존의 증거'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4.3 사건 당시 제주는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제주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주인공의 부모는 아이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저승사자의 눈을 피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옥'이라는 여자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 이름은 영옥에게 평생 부끄러움이자 상처였지만, 동시에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증거'이기도 했다.
영옥이라는 이름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죽음의 세계로 보내지 않고 이승의 삶에 붙들어 매어둔 마지막 닻이었던 셈이다.
침묵에서 서사로, 고통에서 정체성으로
하지만 이름이 곧 정체성이 되지는 않는다. 이름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복원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는 사람을 기억하며 이야기를 덧붙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끝내 남는 것은 이름이다.
폴 리쾨르(Paul Ricœur,1913~2005)는 인간의 정체성이 삶의 이야기를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름은 그 서사의 가장 마지막 형태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말해지지 못한 삶일지라도, 이름은 그 존재를 증언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들은 묻는다.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
이 질문은 한 가족을 넘어, 한 시대 전체를 향한다. 말해지지 않았던 역사, 기록되지 못했던 이름들, 그리고 의도적으로 남겨진 공백들. 아들은 마침내 자신의 이름 속에 깃든 서사를 찾아낸다.
“이름이 있어야, 사라지지 않아.”
이 대목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존재의 증거가 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기억하는 일이며, 기억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현재에 남겨두는 행위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소년이 말하는 “이 이름… 이제 버릴 수가 없어.”
"죽지 말라고, 제발 죽지만 말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내가 그걸 몰랐네."
"이름은 불러줘야 이름이지. 내 이름은... 영옥이여."
라는 고백은, 이제 그가 자신의 이름을 통해 4·3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서사와 관계 맺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영옥’이라는 이름은 이제 수치심이 아니라, 그가 통과해 온 삶의 증언이 된다.
"이 이름이 나한테는 평생 짐이었어. 그런데 알고 보니 나를 살리려고 지어준 이름이더라고."
작별하지 않음으로써 기억되는 것들

반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름조차 희미해진 자리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경하는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에 가게 된다. 인선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자신의 집에 남겨진 새를 부탁하며 경하를 제주로 보낸다. 폭설 속에서 제주에 도착한 경하는 인선의 집에 머무르며, 점차 인선 가족의 과거 _특히 어머니 세대가 겪은 4·3의 참혹한 기억_을 마주하게 된다.
폭설은 세상의 모든 흔적과 비극의 현장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동시에 진실을 가리려는 이미지를 상징하며 새 (Bird)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상징하며,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존재이다.
이 작품은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 혹은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눈으로 덮인 풍경 속에서 기억은 또렷하게 말해지지 않지만, 결코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별을 거부함으로써 그 고통의 곁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T.S.엘리엇(T.S. Eliot,1888~1965)은 시집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다. 죽은 땅 위로 라일락을 밀어 올리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잠든 뿌리를 끝내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그에게 4월의 잔인함은, 끝났어야 할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 있었다.
제주 또한 그러하다. 제주의 들판 위로 피어나는 유채꽃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그 빛이 환할수록 그 아래 잠든 시간은 더욱 깊은 어둠으로 떠오른다. 꽃은 피어남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증언하고, 우리는 그 찬란한 노란빛 앞에서 끝내 작별하지 못한 이름들을 다시 부르게 된다.
해마다 돌아오는 이 계절은 과거를 닫지 못하게 하고, 잊힌 것들을 다시 우리 앞에 세운다. 생명이 되살아나는 일이 곧 고통의 기억을 깨우는 일이라는 것, 그 역설 속에서 제주 4월은 잔인하면서도 숭고하게 빛난다.
우리는 여전히, 작별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살아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109쪽)
눈에 보이는 상처가 아니어도, 살아 있는 존재와 맞닿았던 시간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보다 깊고, 이야기보다 오래 남아 우리를 붙든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잊을 수 없는 것에 붙들려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이름을 부를 것인가, 아니면 끝내 작별하지 않을 것인가.
중요한 것은 어쩌면 방식이 아니라 태도일지 모른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 기억을 지금으로 불러내는 일.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작별하지 않는다.
4월은 지나가지 않는다, 아직 불리지 않은 이름들이 남아 있는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