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광주 > 웹진 『플광24』 > [이여진의 로컬&지역발전 이야기] 1980년, 내가 겪었던 518

웹진 『플광24』


[이여진의 로컬&지역발전 이야기] 1980년, 내가 겪었던 518

이여진| |댓글 4 | 조회수 223

1980년 5월 18일 오후, 나의 집에 숨어든 대학생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당시 고교 2년생이었던 나는 곧 있을 중간고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 학생회관(현 청소년삶디센터)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리 잡고 공부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남로 쪽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비상계엄 철폐하라".


시위대의 함성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고, 오후가 되자 도저히 공부를 지속할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요란해졌다. 책을 싸 들고 도서관을 나와 충장로 우체국을 거쳐 집으로 걸어오는 길, 눈앞에서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로는 이미 매캐한 최루탄 가스로 가득해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었다.

 

내가 살던 집은 도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도 안되는 곳에 주택가 골목에 있었는데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이 발칵 뒤집혔다. 금남로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고, 군인들에게 쫓기던 대학생 4~5명이 필사적으로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급히 대문을 열어 그들을 집 안으로 들인 뒤, 집 뒤편 깊숙한 곳에 숨겨주었다. 담장 너머 골목길에서 거친 군화 소리와 고함이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군인들이 시민을 무차별 폭행하고, 주택가 골목까지 쫓아와 집집마다 뒤지며 사람들을 잡아가는 믿기지 않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집에 숨었던 학생들은 들키지 않고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우리집에서 각목과 기왓장을 챙겨 나가던 그들의 모습이 선하다.


그날 저녁 TV를 켰다. TV(아마도 MBC였다고 기억한다)에서는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박찬희 선수의 타이틀 전이 방송되었다. 일본 선수와 맞붙은 경기는 기대를 저버린 채 시종일관 무기력하게 밀리다 어이없는 KO패로 끝이 났다. 나는 경기의 승패보다 조금 전 낮에 목격했던 그 끔찍한 진압의 현장이 뉴스로 나오는지 채널을 돌려가며 확인했다. 하지만 화면 어디에서도 광주의 소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철저한 언론 통제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이틀 뒤 그 방송국 건물은 불탔다.


1980년 5월 21일, 피로 물든 석가탄신일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거리에 연등이 걸리고 자비와 평화가 넘쳐나야 할 오후, 도청 앞 분수대 광장과 금남로에는 난데없이 엄숙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식을 초월한 비극이 시작됐다. 국민을 지켜줄 줄 알았던 국군이,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총구를 겨누고 무차별 조준 사격을 감행한 것이다.나는 그 시간 금남로가 아닌 근처 골목에 있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훗날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군인들의 사격에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이 낙엽처럼 쓰러지고, 피 묻은 옷을 입은 이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골목으로 숨어들던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아마 소설 〈소년이 온다〉속 동호가 마주했던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비로워야 할 부처님 오신 날, 광주 금남로는 가장 처절하고 비극적인 학살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 >

(자료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사진)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분수대 광장


계엄군의 발포 이후 시민들도 자구책으로 예비군 무기고, 자동차공장등에서 소총과 지프차등을 뺏어와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오후에 계엄군이 외곽으로 물러나자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도청을 접수했다. 이른바 '광주 공동체'의 시작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도청 앞 분수대 광장으로 나가 시민궐기대회에 참여하였다. 광장에 모여 앉아 시민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군부독재 세력의 퇴진을 외쳤다. 집회 때마다 등사기로 밀어 나누어 주던 신문, ‘투사회보’는 시민들의 소식지이기도 했다.  나는 그 투사회보를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 부모님과 함께 읽기도 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방 한편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이 투사회보들은, 조만간 5·18 기록관에 기증할 계획이다). 


그 시절 나는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지프차를 타고 달리던 시민군들의 모습,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칼빈 소총을 들었던 시민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깊은 후회로 남은 일이 하나 있다. 당시 내게는 일본에 계신 큰어머니가 선물해주신 하프 필름카메라가 있었다. 왜 그때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그 순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남겨두지 못했을까. 지금도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5월 26일 저녁, 삶의 선택


5월 26일 오후,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에 참여한 뒤 화정동 인근 도로에 바리케이드가 쳐진 곳까지 행진을 이어갔다. 행진에 참여한 인원은 대략 1,000여명 정도로 기억한다. 사실 그날 아침에도 신부님들과 변호사 그리고 주요 인사 등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계엄군 진입 소식을 듣고 농성광장 앞 거리로 나서 "우리를 밟고 지나가라"며 온몸으로 저지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행진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표정에는 뭔가 비장함이 가득했던 것 같다.


저녁 무렵 행진을 마치고 다시 도청 앞으로 돌아왔다. 도청 안으로 들어가 진압군에 맞설 채비를 하는 사람들과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대다수가 귀가의 길을 택했고 나 역시 도청에 남지 않고 귀가하였다. 밤중이나 새벽에 진압군이 다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감돌던 그 저녁, 도청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던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그날 저녁 도청에 남아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항전하다 사망했던 이들 중에는 성인들이나 대학생들도 있었지만 어린 중고생들도 7명이나 있었다. 그들의 용기와 의지가 있었기에 지금의 오늘이 있었던 것 아닌가? 새삼 머리를 숙일뿐이다.  


5월 27일 새벽, 끝내 찾아온 어둠


잠결에 번쩍 눈이 떠졌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무렵이다. 내가 살던 집이 도청과 매우 가까웠던 탓에 무시무시한 총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두려움에 감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유탄이 방 안으로 날아들까 봐 두꺼운 이불로 유리문을 겹겹이 두른 채 숨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라디오를 틀었다. 광주 KBS 방송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방송에서는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나오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폭도들은 항복하라"는 멘트가 끊임없이 반복됐다. 그리고 이내 도청 진압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듯 승리의 노래가 계속 방송되었다. 나는 그날 아침 들었던 그 음악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처절했던 광주의 5월은 끝이 났고 기나긴 어둠이 찾아 왔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오월


세월이 흘러 이 글을 쓰는 지금, 온 나라가 스타벅스의 ‘518 탱크’ 마케팅으로 분노하고 있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비극적인 행태다. 몇 년 전에는 무신사에서도 카드뉴스에 ‘탁, 억’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마케팅을 했다니, 아직까지도 518을 폄훼하고 조롱하는 인간들이 있다니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12·3 내란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버젓이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오월의 가치를 훼손하고 모독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광주의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마음속 도청 광장에는 여전히 그해 5월 분수대에서 터져 나오던 시민들의 함성이 고여 있다. 함께 분노하고 싸웠으나 나는 살아 남았다. 어쩌면 운좋게 살아 남았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518광장과 금남로를 걸으면 그날의 시민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도청 앞 분수대와 광장, 금남로의 풍경은 세월에 따라 변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죽는 날까지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1 


‘민주화운동’인가?, ‘민중항쟁’인가? 최근 국회에서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려던 개정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통과되지 못했다. 부결의 아쉬움과 더불어, 이번 개정안에 쓰인 표현을 두고 한 가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개정안에는 ‘부마민주항쟁’과 더불어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5·18이야말로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 국가 폭력에 온몸으로 대항했던 거대한 ‘항쟁’이다. 그런데 왜 법 제도에는 이토록 온건한 용어인 ‘민주화운동’으로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이미 법률적·제도적으로 안착된 용어라 바꾸기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제라도 우리는 5·18을 단순한 ‘민주화운동’을 넘어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5·18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동시에, 쿠데타로 국가를 찬탈한 불의의 권력에 맞서 시민과 민중이 처절하게 전개한 목숨 건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2 


구 전남도청이 복원을 완료하고 개관하였다. 개관 첫날 도청과 도경찰국 건물을 둘러 보았는데 기대와 달리 콘텐츠가 미비한 점이 아쉬웠다. 당시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머무르면서 활동했던 실내 공간에 대한 제대로 된 고증이 부족한 탓인지 일부 공간은 당시의 기억과 다르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LP와 책을 진열해놓은 휴게라운지 공간의 경우 시설은 넓고 좋았으나 LP나 도서들에 대한 체계적인 큐레이션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 얼른 눈에 띄었다.


첨단 기술장비와 시청각 미디어도구 등을 활용해 누구나 (특히 젊은 세대) 쉽게 학습하고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 확대・보강이 꼭 이루어졌으면 한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작년에 방문해보았는데 역사콘텐츠를 이렇게도 구성할 수 있는구나 할 정도로 인상 깊었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참조하여 공간운영, 콘텐츠 구축, 체험물 등 보강을 제대로 하여 한번 방문하고 다시는 오지 않은 그런 공간이 아니라 두고두고 찾아오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복원후 구 전남도청내 518휴게라운지 >



4 댓글
레드 05.21 15:47  
5.18을 대할 때 마다 아프고 슬프고 미안하고 화가 난다.  왜 아직도 정리가 안되는가?  왜 인간은 그리 나쁜 종자들이 있는가?  전두환 노태우는 죽어서 지옥에 갔을까?
이재의 05.22 19:1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억들을 기록해야 합니다. 자기의 관점에서 당시 어떻게 느꼈고, 어떤 생각 속에서 무슨 일을 했는 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5.18은 어느 한 두 사람의 영웅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노력이 소홀하면 자칫 몇몇 사람의 영웅적 행적만 남게 되기 마련입니다. 아예 노골적으로 북한군이 침투했다느니 하면서 허위 왜곡을 날조하기도 합니다. 그런 잘못이 판치지 못하게 평범한 광주 시민들이 당시 자신이 체험했고, 느꼈던 기억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해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담담하게 그날을 회고한 이여진 님의 기억과 기록은 값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대영 05.23 18:58  
이재의 선생님의 댓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월광주'가 몇사람의 이름만 오르내려서는 안될 일이지요.
이여진님과 같이 10일 간의 항쟁 기간 동안 국가의
폭력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수많은 시민들의 저항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46년만에 자신의 항쟁 경험을 꺼내 놓은 이여진님의 글은 귀하다 싶습니다.
계속해서 이여진님들의 항쟁 경험이 이어지면 좋겠다 싶습니다.
박서인 05.24 10:59  
교수님 글을 읽으니 그 때의 현실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스타벅스의 5•18을 조롱하는 듯한 마케팅은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 이 잘못된 마케팅을 통해 5•18의 참된 의미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왜곡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음 하는 바람입니다.
교수님의 진심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카카오톡 채널 채팅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