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의 세상유감] 20조라는 숫자는 크지만..
< 전남 청책대동회 바란 4차 출처:전라남도청 >
지난 3월 28일 장성에서는 전라남도 주최로 ‘20조, 시민이 설계하자’는 청(聽)책대동회가 열렸다. 시민이 설계한다는 이야기에 솔깃하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까 궁금하여 참석하였다. 하지만 초반에 나온 전남발전연구원 등의 발제는 솔직하게 말하면 실망한 게 사실이다. 물론 그 내용이 정책이 되진 않겠지만 20조를 바라보는 시각차는 여전했다.
역시나 사람의 이야기는 없었고 대신 도로와 철도, 산업단지의 이름들이 앞에 놓였다. 광주와 전남의 연결을 말하지만, 그 연결은 건물과 콘크리트 위에 그려졌다. 통합이라는 단어는 거창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길의 길이와 예산의 크기로 도시를 설명하려 하고 있었다.
“통합의 예산이 아니라, 상상력의 예산이 필요하다”
광주·전남 통합 논의 역시 그 익숙한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4년, 20조 원이라는 막대한 재정이 더해진다. 숫자는 충분히 크다. 그러나 돈의 크기는 방향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숫자가 클수록, 우리는 더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돈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어떤 도시를 마주하게 될 것인가.
“돈은 커졌는데, 상상력은 그대로다”
지금의 통합은 방향이 아니라 사업이 되어가고 있다. ‘무엇을 연결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얼마나 확보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렇게 통합은 도로 몇 개, 철도 몇 개, 산업단지 몇 개로 구성된 ‘패키지’로 정리된다. 통합은 계획이 아니라 목록이 되고, 비전이 아니라 사업명이 된다. 그 사이에서 도시는 점점 더 잘게 나뉘고, 사람은 그 바깥으로 밀려난다.
문제는 그 순간 통합의 주체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시민은 계획을 함께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완성된 결과를 기다리는 대상이 된다. 도시는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숫자가 오가는 판이 된다. 통합은 관계를 잇는 일이 아니라, 사업을 묶는 일이 된다.
“우리는 미래를 말하면서 과거의 방식으로 돈을 쓰고 있다”
물론 기반 시설은 필요하다. 길은 놓여야 하고, 이동은 더 편리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길이 이어진다고 해서 도시가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물리적 연결은 가능하지만, 사회적 통합은 여전히 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길의 개수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어떤 삶이 가능해지는가이다.
해외의 사례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빌바오는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라 도시의 방향을 다시 설계했다”
스페인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설명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문화, 교통, 환경을 함께 재편한 도시 전체 전략이 작동했다. 그 결과는 관광 증가를 넘어 지역의 예술 생태계와 경제 구조의 변화로 이어졌다.
< 구겐하임 미술관 전경 출처:Guggenheim Bilbao 공식 웹사이트 >
“맨체스터는 공장을 늘리지 않고, 창작자를 늘렸다”
영국 맨체스터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도시를 채울 것인가”를 고민했다. 결국 산업이 무너진 자리에 공장을 늘리는 대신, 음악과 미디어, 디자인과 같은 창작 산업에 투자하며 도시의 정체성을 바꿨다. 이 도시들이 선택한 것은 더 많은 인프라가 아니라, 사람과 콘텐츠,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경험이었다.
두 도시 모두 길이 아니라 이야기를 선택한 결과였다. 그렇게 두 도시는 ‘사람이 머무는 이유’를 만들었고 성공했다. 두 도시의 변화는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성공은 더 많은 시설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과 콘텐츠,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에서 나온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20조라는 거대한 재정 속에서 문화와 예술, 창작과 같은 ‘보이지 않는 영역’은 여전히 뒤로 밀려나 있다. 공간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을 살아 움직이게 할 사람과 콘텐츠에 대한 고민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건물을 짓는 데 익숙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데에는 서툴다.
이 문제는 특정 분야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 문화, 관광, 도시 전반에서 반복되는 구조다. 시설은 빠르게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지속 가능하게 운영할 사람과 생태계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업이 완공과 동시에 정점을 찍고, 그 이후에는 서서히 잊혀진다.
< 경북 영주 선비세상 전경 출처:경북문화관광공사 >
경북 영주의 ‘선비세상’은 약 1,600억 원이 투입된 대규모 관광시설이지만, 개장 이후 유료 관람객은 하루 평균 80여 명 수준에 그치며 연간 60억 원의 운영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에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지역 관광개발 현장은 그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계획만큼은 참 화려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남는 건 시설뿐이다. 결국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곳에 ‘버텨줄 사람’을 심었는가.
문제는 관광이 아니라 방식이다. 단기간 성과를 전제로 한 사업 구조 속에서 사람과 관계, 그리고 콘텐츠는 언제나 뒤로 밀려난다. 그러나 지역을 바꾸는 일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신뢰가 쌓이고, 작은 시도가 반복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뿌리가 생긴다. 그 과정을 건너뛴 투자는 결국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관광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시 전체가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의 연결이 만들어지고, 역할이 생기고, 관계가 쌓여야 비로소 지속 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진다. 결국 핵심은 커뮤니티다.
"위험한 것은 인구감소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감소다. 연결이 끊어지고, 역할이 약해지고, 공동체가 파편화될 때 사회 생태계는 붕괴한다." 미국의 사회평론가 데이비드 브룩스의 말이다. 결국 도시를 지탱하는 것은 시설이 아니라 관계다. 그리고 그 관계는 예산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20조를 어디에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도시의 성격’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20조를 어디에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가를 묻는다. 만약 그 답이 여전히 도로와 산업단지에 머물러 있다면, 통합은 시작도 하기 전에 방향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통합은 예산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의 밀도와 경험의 깊이, 그리고 사람에 대한 투자로 만들어진다.
길은 이미 충분히 놓였다. 이제는 그 길 위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도시를 다시 그려볼 용기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