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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상‘s 클래식] 그 밤 잠들지 못한 것은 우리들의 낭만이었다

나윤상| |댓글 0 | 조회수 78


오페라에서 테너(Tenor)는 주로 주인공 역할을 담당한다. 남성 성부 가운데 가장 높은 음역을 맡는데, 특히 하이C(C5)는 테너의 상징적인 음으로 여겨진다.


테너는 라틴어 Tenere (잡다, 유지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원래는 선율의 중심을 유지하는 성부를 뜻했다.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라보엠’의 루돌포,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만리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카니오 등 오페라를 대표하는 주인공들이 대부분 테너 배역이다.


1990년 7월 7일 이탈리아 로마 대형 유적 카라칼라 욕장에서 역사적인 콘서트가 열렸다. 카라칼라 욕장은 서기 216년 로마 황제 카라칼라가 건립한 대규모 공중목욕시설로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와 함께 로마를 대표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한 곳이다.


사진 왼쪽부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주빈메타, 루치아노 파바로티 >


이날 무대에는 지휘자 주빈메타와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Orchestra del Maggio Musicale Fiorentino)와 로마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Orchestra del Teatro dell'Opera di Roma)의 200여 명의 연주자가 참여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이른바 ‘3테너’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연을 월드컵 전야제 공여으로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호세 카레라스의 백혈병 완치와 그가 설립한 백혈병 재단을 지원하기 위한 자선 콘서트의 성격이 강했다. 다만, 공연이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전날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전 세계 축구팬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특히 이날 세 테너가 함께 부른 푸치니 ‘투란도트’ 칼리프 왕자의 아리아 ‘공주는 잠들지 못하고(Nessun Dorma)’가 큰 인기를 받으면서 사실상 이탈리아 월드컵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자리잡았다.


2026년 현재 3테너 중 한 명이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고인(2007년 작고)이 됐고 플라시도 도밍고는 성추행 등의 의혹으로 음악계에서 활동이 크게 위축됐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 올해로 79세인 호세 카레라스는 백혈병 재단 활동과 자선 공연을 통해 꾸준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인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악적 특색은 가볍게 내뿜는 하이C음과 군더더기 없는 시원한 창법이다. 오페라 라보엠에서 루돌포의 아리아 ‘그대의 찬손(Che gelida manina)’은 지금도 수많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해석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스페인 출신인 플라시도 도밍고는 바리톤으로 성악을 시작한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도밍고의 장점은 극적 표현력에 있다. 특히, 베르디 ‘오델로’에서 오델로 장군이 보여주는 위엄, 사랑, 질투, 광기, 절망을 노래로 표현하는 능력은 당연 압권으로 손꼽힌다.


호세 카레라스는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서정성과 인간적인 비애를 잘 표현한 테너로 평가받는다. 많은 애호가들이 그의 음색을 가리켜 ‘인간적인 목소리’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노래를 들어보면 화려함보다는 따뜻함이, 영웅성보다는 인간의 고뇌와 상처가 담겨있다.


베르디 ‘운명의 힘’에서 알바로 역을 노래한 카레라스는 복수와 죄책감, 용서와 절망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운명의 힘 이중창 ‘알바로, 숨어도 소용없다 (Invano Alvaro)’에서의 카레라스가 보여준 연기는 압권이다.


올해 열리고 있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은 미국, 멕시코, 캐나다 3개국에서 개최되며 48개국이 참가하는 최초의 월드컵이다. 경기 수가 크게 늘어나 축구팬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하겠지만 과거 월드컵 특유의 긴장감과 응축된 드라마는 다소 희석된 느낌도 있다.


어쩌면 시대가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제공하고 스마트폰은 전 세계 경기장과 연결해 준다. 모든 것이 가까워졌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은 더 멀어지는 듯하다.


36년 전 카라칼라 욕장의 무너진 돌기둥 사이로 세 명의 테너가 노래를 불렀던 로마의 여름밤,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별빛처럼 하늘을 올랐고, 도밍고의 노래는 인간의 비극을 품었으며 카레라스의 음성에는 삶을 되찾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날 경기장의 함성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세 사람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승부는 기록으로 남지만 노래는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


북중미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문득 카라칼라의 밤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축구를 보기 위해 모였지만 마음속에 남은 것은 한 곡의 노래였다.


‘Nessun dorma’


그 밤, 잠들지 못한 것은 공주가 아니라 우리들의 낭만이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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