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립니다
작품수
회화, 설치 등 60여 점
기획의도
‘광주청년작가초대전’은 하정웅미술관이 매년 지역 청년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기획 초청 프로그램으로, 동시대 예술가들이 사회적 현실과 역사적 감수성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조명해왔다. 2025년 초대작가로 선정된 이세현은, 오랜 시간 한국 사회의 잊힌 장소와 침묵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개입해온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통해 이번 전시의 주인공으로 자리했다.
전시내용
작가가 오랜 시간 천착해온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과 상처를 다룬 대표 연작들을 조망함으로써, 사진 매체를 통해 과거와 현재, 침묵과 발화, 장소와 정서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이세현은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 사회의 역사적 장소를 탐색하고, 그 안에 응축된 기억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기록해왔습니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마주한 장소들은 단순한 폐허나 유적이 아니라, 체제의 폭력과 시대의 침묵이 응결된 공간입니다. 그의 사진은 그러한 장소를 담담히 담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망각 속에 잊힌 장소를 감각과 질문의 대상으로 되살려냅니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푸른 낯, 붉은 밤》은 폐허가 된 역사적 장소에 다양한 색의 조명을 설치하여 촬영한 작업으로, 이세현의 예술적 감각과 사진적 사유가 집약된 대표 연작입니다. 작가는 노근리, 거창, 코발트광산, 505보안부대, 국군광주병원 등 근현대사의 아픔이 각인된 공간에 밤의 조명을 밝힘으로써, 망각 속에 침전된 장소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킵니다. 푸른빛은 상실과 애도를, 붉은빛은 폭력과 분노의 잔상을 상징하며, 조명 아래의 공간은 다시 ‘현재의 장소’로 호명됩니다. 작가에게 장소란 단지 사건이 벌어진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감정의 구조이며, 기억의 표면을 걷어내야 드러나는 역사적 감응의 자리입니다.
함께 소개되는 《Boundary(경계)》 연작은 장소에 대한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통해 역사와 시각, 존재와 응시 사이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합니다. 작가는 역사적 장소에 돌을 던지는 행위를 수행하며, 그 장면을 사진 속에 정지시킵니다. 공중에 떠 있는 돌은 침묵 위에 던져진 질문이자, 과거의 균열을 깨우는 감각적 제스처이며, 작가 자신이 이미지 속으로 개입한 흔적입니다. 이 시리즈는 단순한 풍경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의 작동 방식과 응답의 윤리를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시각적 역사학으로 기능합니다.
이세현의 작업은 다큐멘터리와는 결을 달리합니다. 그는 과거를 단지 재현하거나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원될 수 없는 기억, 설명되지 않는 흔적, 침묵 속에 갇힌 장소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감각화하고, 관람자에게 질문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이는 사진을 정보의 전달 수단이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자 시간의 조각, 역사적 사유의 도구로 사용하는 실천입니다. 작가에게 사진은 질문이며, 관람자에게는 응답을 유도하는 매체입니다.
‘푸른 낯’과 ‘붉은 밤’은 단지 시간의 구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감정의 결이며, 기억의 상태를 상징하는 시적 은유입니다. ‘낯’은 장소가 지닌 표면적 감정의 얼굴이고, ‘밤’은 그 이면에 감추어진 내면의 시간이며, 이 둘을 대비시킴으로써 작가는 상처의 얼굴과 응시의 깊이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대비는 단지 색채의 선택이 아니라, 작가가 오랜 시간 고민해온 시각적 구조이자 사진적 언어입니다.
이번 전시 《푸른 낯, 붉은 밤》은 단지 과거의 장소를 소개하는 전시가 아닙니다. 이세현은 사진을 통해 기억의 윤리를 성찰하고, 예술이 역사에 응답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합니다. 전시는 조용하지만 무겁게, 서정적이지만 단호하게,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그들은 왜 잊혀졌는가?”, “그 자리는 왜 비어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가?”와 같은 말 없는 물음들입니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사진 매체의 미학적 확장뿐 아니라, 동시대 예술이 어떻게 사회적 기억과 윤리적 응답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이세현 작가의 사진은 우리에게 역사를 회상하게 하기보다는, 역사의 장소 앞에 다시 서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건넵니다.
이번 전시가 관람자 여러분께 침묵을 응시하는 시간, 그리고 잊힌 감정을 다시 꺼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품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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