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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상헌 - 희생자를 떠나보내는 국가와 공교육의 품격

플레이광주 1 760 01.03 16:25

해를 넘겨 참사 5일째를 맞는다

발은 늘 걷는 길을 맴돌고만 있지만 마음은 시리고 아프고 분하다그리고 미안하다

슬픔과 충격무기력감에 뉴스를 피하고 싶지만 즐겨 찾는 페이스북에선 아픈 이별의 사연들을 피할 수가 없다.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교사의 글에서 담양에서 작물 농사를 짓는 형수가 12월 딸기농사를 마치고서 집안의 형수들과 함께 태국여행을 갔다가 모두 참변을 당했다며 망연자실하는 넋두리를 본다.

 

  


페친인 전주MBC기자는 언론대학원을 함께 했던 KBS광주방송 기자와 그 남편 목포MBC방송 PD의 비보를 전하며 희생자가 쓴 아름답고 정의로운 기사들을 애도하며 소개한다.

179명의 희생자. 거주별로는 81명이 광주이고, 76명이 전남이니 다들 한 다리 건너면 그 누군가의 지인들로 희생자와의 인연이 밟힐 터이다.

내가 사는 화순도 10여 명 넘게 사고를 당했다 하고, 탑승객 중 10대 이하가 14명이나 되니 학생 희생자를 품은 학교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재직하는 학교에서도 제주항공 참변으로 인해 한 학생이 조부와 조모를 잃고서 여러 날 결석 중이다.

교사는 이럴 때면 조마조마하다. 재난을 겪고 참변을 당할 때면 학교가 사람의 공동체인지, 삭막한 이해집단에 불과한 것인지가 드러난다. 뻔히 드러나는 아픔을 쉬쉬 감추거나 모른 채 하면 그야말로 염치없는 인간관계일 터이다. 평소에는 사람의 도리니, 예의니, 시민의 자질이니 떠들다가도 정작 눈앞의 아픔 앞에서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낯빛을 감추는 것에서 학교의 본질은 드러나고 교사의 교사됨은 위기에 부딪힌다.

 

사람살이의 공동체에서 관계의 진정성과 사람의 도리를 심판하는 대표적인 것이 서로의 애사(哀史)를 마주하며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일이다. 작다면 작고 혹시는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학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의 애사, 즉 친구의 애사를 동료들이 어떻게 받아안고 서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전하는 것을 학교는 종종 소홀히 하고 지나친다.

학생들끼리 관계의 친소를 따라 각자 끼리끼리 챙길 일이지 굳이 학급이, 굳이 학교가 나설 일인가 라며 되물을지 모르나 학교가 하나의 커뮤니티이고, 학급이 공동체임을 몸으로 느끼는 것 역시 친구가 아프고 힘들 때 위로를 주고받음에서 시작된다.

내가 30대 중반에 재직하던 학교에서의 아픈 기억을 떨칠 수가 없다.

광산구의 ㄱ 중학교 재직할 때 1학년 여학생이 등굣길에서 트럭에 치이는 참변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그 학급의 학생들은 자신의 친구와 생이별을 한 것이다. 어린 시절일수록 친구의 죽음은 매우 충격적이지 않는가.

나는 학생부장 선생님을 설득하여 아침 방송조회를 통해 간단히 추모하는 묵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분은 곧장 공감하고 급히 외출하여 전교생이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조화를 사가지고 오셨다. 조촐하나마 그렇게 친구를 떠나보내는 학생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시간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한 묵념은 집행되지 않았다. 누구보다 학교장이 단연코 안된다며 반대하셨다. 인간으로서 도리와 학교공동체의 책임을 언급하며 간청했지만 학교장은 슬픈 일은 조용히 지나가야 한다.’라며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충돌을 다루는 것으로 국가의 법이나 왕의 법을 초월하여 신의 법, 양심의 법을 드러내는 자연법 사상의 원전이다. 근대인권법의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도 평가 받는 <안티고네>의 핵심은 결국 반역자일지라도 그것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려는 동생의 양심에 대한 정당성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등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국가, 인권과 자연법으로 끊임없이 실정법을 성찰하는 국가의 모습에 도전하고 있다. 국가만이겠는가? 시민들이 몸담고 사는 직장이라거나 동네라거나 학교라거나 하는 작은 공동체들도 이제 생존을 위해 침묵하고 몸을 바치는 곳이 아닌 인간의 삶, 양심과 도리가 살아나는 공동체의 품격을 갖추도록 변해야 할 것이다.

90년대 삼풍백화점 참사라거나 성수대교 참사 때와 비교하면 이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우리의 눈높이가 많이 달라졌다. 당시엔 생명의 구조가 운수 좋은 일이고 기적인 것처럼 화제거리였지만 30여년이 지난 요즘은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국가와 공동체의 도리가 책임이고 의무로 엄격히 요청되는 시기를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주위를 돌아보면 제주항공 참사를 애도하는 현수막이 여기저기서 나부낀다. 보여주는 전시행정에 익숙한 관료조직일수록 더욱 신속한 것 같다. 그렇지않은 직장이나 학교들은 여전히 상급단위의 지침이 있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심지어 희생자가 있는 학교에서조차도 말이다.

무안공항에는 지난 주말에도 참배객들이 많이 몰렸다. 너무도 소중한 위인들을 떠나보내면서 사람이 주인인 사회’, ‘사람이 주인인 교육’, 민주시민의 국가를 확인하는 감동이 울려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체포영장의 분노를 뛰어넘어 희생자와 유족과 모든 시민에게 함께 하는 평화의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Comments

배형섭 01.06 05:22
오랜만에 가슴 찡한 글을 읽었네요. 교사여서 그런지 학교 공동체가 시민들의 죽음에 침묵하는 상황이 너무도 와 닿네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써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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