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노래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20여년 가까이 해오면서 광주를 대표하는 가수는 누구일까 생각해보면 오늘 소개하는 이 가수라고 주저없이 말씀드릴 수 있다. 그 가수의 본명은 서문석인데 금호동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금호동은 1960년대 초중반을 주름잡았던 불세출의 가수였으나 인기절정일 때 불미스러운 일로 내리막 길을 걷고 그 이후로 잊혀진 비운의 가수다.
1938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금호동은 1945년 해방이 되고 가족의 고향인 광주로 이주하면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광주에서 살았다. 학업을 마친 후 서울로 상경해서 한 때 양화공으로 있다 각종 가요 콩쿠르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냈던 금호동은 1958년 당시 오아시스 레코드사 전속가수 모집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고 전속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금호동이라는 예명은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이재호가 금호동의 외모가 호동왕자를 닮았다해서 지어준 것이다.
금호동은 1959년 당대 최고의 작사가인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노래 '신의주 사나이'를 불러서 SP음반으로 발표하고 데뷔했다. 이후 '눈물의 모자등', '봄 없는 청춘', '호남선 밤열차' 등을 발표한 뒤에 1959년 11월 육군 군악대로 입대해서 노래도 하고 베이스 연주도 했다.
1962년 8월 전역 후에는 작곡가 박춘석에게 발탁되어 가수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 가요계는 배호, 남일해 등 저음의 남자가수들이 인기를 얻던 시대였는데, 금호동의 목소리는 미국의 가수 폴 앙카나 닐 세다카처럼 고음을 구사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서구형의 미남이어서 작곡가 박춘석이 이를 눈여겨보고 픽업했던 것이다. 이후 박춘석과 콤비를 이루고 1963년 '산유화'를 시작으로 '현해탄아 잘있거라', '고향 하늘은 멀어도' 등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곡인 '고향 하늘은 멀어도'는 당시 동아방송에서 13주 연속 1위에 올랐고, 후속곡인 '내일 또 만납시다'는 9주 연속 1위에 오른 히트곡이 되어서 당시 퇴근 무렵 전파상마다 틀어 주던 단골 노래였고 1970년대까지 음악감상실의 영업 마감곡으로 많이 쓰였다. 이 같은 인기에 '내일 또 만납시다'는 1964년 노필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금호동은 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후속곡인 '고교 3년생'은 8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금호동은 당대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다.
1964년 말에는 자신의 히트곡과 신곡을 실은 첫 독집음반 ‘앵콜아워’를 냈다. 잘 생긴 외모와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진 금호동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래서 여러가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한 권혜경과 1964년에 ‘푸른 꿈은 빛나리’라는 곡을 듀엣으로 불렀는데, 권혜경에게 둘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냐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통 올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유부녀들이 그에게 열광하자 “금호동 때문에 가정을 유지할 수 없다”며 남편들이 금호동의 집 앞에 찾아와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1964년 12월 28일 폭행을 당한 금호동은 깡패들 때문에 더 이상 노래를 못하겠다고 가요계 은퇴를 통보하고 가족이 있는 광주시 학동 1구 72번지의 집으로 내려와 버렸다. 가장 인기절정일 때 벌어진 이 일은 언론에 의해 일파만파로 번져서 폭행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금호동은 작곡가 박춘석과의 동성연애로 힘들어서 가수를 그만두었다고 폭로해버렸다. 가수협회의 자체조사 이후 추문은 사실무근으로 발표되었고 금호동은 협회에서 제명당하고 박춘석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
가수 활동을 못하게 된 금호동은 광주 집에 머물면서 영어 공부를 하고 1965년 10월 광주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관람도 하면서 근신을 했다. 그런 금호동을 위해서 광주시민들은 금호동이 다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제재를 풀어달라는 진정서를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그런 노력으로 1년 만에 제재가 풀리고 금호동은 1966년 1월에 컴백했지만 해보고 싶었던 재즈음악을 하고 음반도 발표할 겸 1966년 6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일본에 살고 있는 친형도 만나고 NHK에 출연해서 그의 대표곡 '고교 3년생'을 일본어로 부른 일본가수 후나키 가즈오와 노래 대결도 펼쳤다. 그러나 한 달 만에 귀국해서 ‘젊은 내고향’을 발표하고 히트시켰다.
그 이후로 1967년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야간 졸업반’, ‘병을 주고 약을 주고’를 발표했고, 1968년엔 본인이 작사·작곡한 ‘안녕하십니까’를 발표했다. 1969년에는 ‘잔잔한 호수’를 발표했지만 60년대 후반 남진-나훈아 시대가 되면서 금호동은 더 이상 예전의 인기는 회복하지 못했다.
196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 50회 전국체육대회 때 각 시도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축하공연을 했다. 서울 대표는 최희준, 부산은 정훈희, 경북은 남일해, 강원도는 이미자, 전남 대표 가수는 금호동이었다.
금호동이 가수로서 마지막 취입곡은 1972년 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의 ‘서울행진곡’과 ‘바다의 자장가’다. 1972년 금호동은 연예협회가수분과위원장 선거에 후보로 나서지만 블루벨즈 4중창단의 리더 박일호에게 패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가수활동을 청산하고 이후 농장경영, 부동산업, 요식업 등을 운영했다.
한 때 광주,전남 대표가수였던 금호동은 한순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주인공이 되어서 당시 세태에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받지도 못한 채 물의를 일으키고 스러져버린 비운의 가수가 되었다.
금호동은 2024년 2월 18일. 85세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쉬쉬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금호동을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잊혀졌지만 그는 광주를 대표하는 가수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광주의 노래를 체계적으로 조사해서 아카이빙해오신 주광선생님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충장로 4~5가에 레트로한 감성으로 DJ가 있는 광주의 노래상설전시관을 만든다면 참 좋겠습니다.
광주출신 가수들..김정호, 금호동, 이장순, 주현미, 수지, 소리모아, 꼬두메, 김원중, 선율, BTS 등. .
전일빌딩 4층 조그만 공간에 전시되었으나 지역사회의 무관심으로 지금은 철거위기에 놓인 광주의 노래 전시관이 안타까운 지역문화 현실을 대변한다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