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주말이면 무등산에 올라간다. 익숙한 산행이지만 갈 때마다 여전히 힘들고 고단하다. 다리에 힘이 빠질 때면 내가 괜히 올라왔다는 자책을 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쉬운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독서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뭔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은 것이 독서이고 글쓰기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꾸준한 독서와 글쓰기가 어렵다. 매번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처럼 원위치를 반복한다. 애써 시간을 내서 독서나 글쓰기 하려고 하면 편안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보폭으로 걸어가야 한다.
나의 인생 책들
《자본론》의 저자 칼 마르크스는 딸 제니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싸우는 것이다.” “그럼 불행은 뭐예요?” “굴복하는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책장에 파묻히기!” 이 위대한 사상가조차 책 읽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고향은 외딴 시골이어서 교과서 외에는 별다른 읽을거리가 없었다. 그나마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작은 목장을 운영하는 집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읽을 만한 잡지나 만화가 있었다. 한번은 거기서 정암 조광조를 다룬 역사 만화를 발견했다. 조광조와 신진 사림은 성리학적 정치 이념에 따라 조선 사회를 개혁하려 했고,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는 결국 기묘사화를 불러일으킨다. 훈구파가 조광조를 모함하려고 벌레를 이용해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새겨넣는 대목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던 기억이 아직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물론 주초위왕 이야기가 픽션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그 덕분에 시골 한 코흘리개 꼬맹이가 역사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조광조 문인이었던 집안 어르신이 피해를 입으면서 우리 집안이 남쪽으로 이주한 것을 보면 이 또한 남다른 인연은 인연이 있었던 듯싶다.
중학생 시절에는 직장생활을 하던 둘째 형이 추리소설 전집을 사 왔다. 형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허름한 방 책장에 전집을 가지런히 진열해 놓았다. 덕분에 나는 ‘셜록 홈즈’ ‘괴도 루팡’ ‘에르퀼 푸아로’ ‘미스 마플’을 만나 천국의 나날을 보냈다. 그들과 경쟁하며 미스터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었다. 가끔 어디서 흘러왔는지, 낡은 세계문학전집 몇 권이 내 손에 들려 있기도 했다. 성적 호기심이 넘쳐나던 그 또래 아이들처럼 나는 야한 구절을 찾아 두꺼운 책을 샅샅이 뒤지곤 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성적 상상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준 안내서였다. 고맙고 감사하다.
그 당시 글쓰기에 자신감을 심어준 분은 중학교 시절의 국어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다. 어려운 학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국어 선생님은 내가 쓴 편지를 칭찬하면서 반 친구들 앞에서 읽어주셨다. 예상치 못한 칭찬에 어깨가 으쓱 치솟아 올랐다.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애착과 애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입시 핑계로 교과서 외에는 제대로 읽은 책이 별로 없었다. 다만 유안진 작가의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곁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대학 입학 후에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수선한 시국에 학교 수업이 눈에 들어올 리 없고, 그렇다고 학생운동에 온몸을 던져 불사르지도 못했던 탓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장자≫ 같은 중국 고전을 주로 읽었다. 어쩌면 먼 과거로 건너가 어지러운 현실을 잠시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책이 두툼해서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좋았다.
대학 생활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트럭 조수도 하고 인쇄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이때 체험을 다룬 소설을 쓰기도 했다. 제목은 거창하게도 ‘노동별곡’. 물론 끝을 보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의 독서는 마구잡이식이었다.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나를 객관화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책을 체계적으로 읽었더라면 내 안이 더 풍성해졌을 텐데 하며 머리를 쥐어박곤 한다. 독서 노트 쓰는 습관을 한참 나중에야 길들인 것도 못내 아쉽다. 독서를 잘하기 위해서는, 책 내용을 내 삶에 축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서 노트를 써야 한다. 뒤늦게야 깨달은 진리다. 스스로 질문하고 능동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공자는 “읽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효과적인 독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엉성하지만 짧은 글을 써보는 것이 필요하다. 독서란 누군가의 글을 읽는 행위인데, 단순히 읽기만 반복하다 보면 생각이 깊어지거나 축적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글을 쓰다 보면 어떤 주제를 잡고, 어떤 소재와 단어를 선택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다. 직접 글을 써보면 내가 작가의 입장이 되어 독서를 할 수 있다. ‘쓰는 것처럼 읽다 보면’ 책에 쓰인 문장과 내용에 좀 더 감정 이입할 수 있고, 작가가 행간에 감추어놓은 의미까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의 사회생활은 순탄치 않은 사건의 연속이었다. 30대 중반에는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마음의 상처가 깊어져서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스스로를 어둡고 좁은 방 안에 가두고 세상과 단절했다. 깊은 절망에 갇혀 길을 잃어버렸다. 방황의 시간은 꽤 길었다. 오로지 술에 취해서 살았다. 그러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책을 다시 들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 루쉰의 ≪아Q정전≫을 통해서 나의 비겁함을 보았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통해서는 삶의 치열함을 배웠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을 통해서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들의 지지와 격려가 없었으면, 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율배반적이고 철저한 계급사회다.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기 힘들고, 개개인의 자율성은 배제된다. 직장생활은 삶의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다. 상처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짓누른다. 눈물 흘리고 주저앉고 넘어진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남았으니 또다시 일어서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내게 다시 일어설 힘을 북돋아 준 자양분은 책이다. 책의 어느 한 문장에서 불현듯 엷은 희망을 찾는다. 깊은 어둠과 진한 새벽을 건너지 않고는 밝은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사람이다.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는 사람이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느냐에 달라지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선한 영향력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경험이다. 경험은 삶의 여정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터득한 산물이다. 다양한 경험은 삶의 지혜를 높여준다. 셋째, 교육이다.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학교에서 배움과 학습을 받는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습득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배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넷째, 독서다. 독서는 간접경험과 학습의 효과를 끌어올려 준다. 독서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보다는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책을 내적 성장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기계적 책 읽기는 그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고 소비할 뿐이다. 고전에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전이 따분하고 고루하다는 생각은 편견이고 오해다. 오히려 고전은 기존 관습과 통념의 틀을 깨면서 늘 새롭게 읽힌다. 그래서 세월을 견뎌내고 살아남았으며, 현대인에게도 파격과 전복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최근 소개받은 작품 중에서 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의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풍자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작가는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시골 마을로 유배당하는데, 그곳에서 만난 숱한 인간군상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면서도 따스하게 묘사한다. 그는 그 당시 고통스러운 시간을 원망하기보다는 그 아픈 시절이 자기를 성장시켰다고, 오히려 고마워한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코> <외투> <광인일기>, 희곡 <검찰관>은 19세기 러시아 관료사회의 모순, 조직의 비정함, 인간성 상실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풍자한다. 고골이 그려낸 스산한 풍경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분야로 보자면 역사 관련 책을 가장 즐겨본다. 독서 편식의 위험을 알지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최근에 사마천의 ≪사기≫,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 만화로 그린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리나라 역사물인 ≪환단고기≫, 고전연구실이 번역한 ≪신편 고려사≫,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 푹 빠져서 읽곤 했다.
독서의 이유
흔들리던 30대 중반에 시작했던 여러 독서 모임을 통해서 폭넓은 독서 요령을 체득했다. 철학을 전공한 교수, 전직 대학 도서관장, 전문작가, 평생을 독서가로 살아가는 분들로부터 여태껏 접해 보지 못했던 철학, 역사, 고전 인문학책에 대한 심오한 내용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들어보면서 내 생각을 갈무리하기도 했다. 솔직히 독서는 혼자 읽는 것보다 여럿이 모여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게 훨씬 유익하다. 다른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고, 시야가 확장될 테니 말이다.
독서는 삶에 필요한 나침반이다. 나침반처럼 독서를 통해서 흔들리는 인생의 나아가는 방향과 목표를 바로 세워야 한다.
살다 보면 쉽게 상처받기 마련이다. 애써 잘 관리하고 있던 우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럴 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독서가 안성맞춤이다. 독서를 통해서 심란한 마음을 달래야 한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치열하게 살아내기 위한 욕망 때문이다.
마음에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