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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 만주에서 보낸 여름휴가 2편

플레이광주 1 224 01.31 10:42

소설 범도와 항일무장투쟁학교 범도루트를 소개한다 

 


- 범도루트 만주 항일무장투쟁 역사학교 지도 -

소설 범도중 몇 장면을 중심으로 나의 의견을 첨부해서 옮긴다. 전쟁에 져서 빼앗긴 나라는 있어도 국무를 맡은 자들이 문서에 도장을 찍어 팔아넘긴 나라는 동서고금에 없었다대한제국의 멸망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너무도 가슴 아픈 글이었다. 토착 왜구들이 발호하는 현실이다. 역사가 반복되면 안 된다.

 

김알렉산드라(Alexandra, 1885~1918)의 죽음은 기억해야 한다. 조선인 노동자의 떼인 노임을 받아준 철도 노조의 전설인 김두서의 딸, 열다섯 살에 아버지 대신 통사(通事)가 된 소녀, 사범학교를 나온 여교사, 우랄 벌목장의 영웅, 우랄 빼르미 공단 노동자의 대변인,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쏘비에트 극동인민정부 외교부 장관. 그녀는 백파 사령관 칼미코프의 고문에도 나는 조선인이기에 볼셰비키다. 침략과 차별, 착취에 시달리며 살아온 조선인이기에 누구보다 투철한 국제주의자가 된 것이다. 당신이 정녕 군인이라면 나를 깨끗하게 죽여라. 혁명가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인민의 이상을 배반하지 않는다. 죽여라총살당하기 직전 그녀는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을 자리는 내가 정하겠다열세 걸음을 걸어 바위 위에 올라선 다음 제가 방금 걸어온 열세 걸음은 제 심장에 새긴, 빼앗긴 조국 조선의 13도입니다. 조선 동포 여러분, 연해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가 밟아보지 못한 조선 13도에 여러분이 평등의 씨앗을 심고 해방의 꽃을 피워주십시오. 노동자, 농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일해온 극동인민정부의 외교장관으로서 저의 마지막 인사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볼셰비키 혁명 만세! 조선 독립 만세!!” 김알렉산드라는 개인의 편안한 삶보다 무산계급의 해방과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산화했던 수많은 여전사 중의 한 명이다.


- 박서양, 한인최초 의사 6명 중 한명으로 간도국민회 총부 군의로 활동했으며 민족교육 사업을 주도했음(1917년 세브란스 졸업앨범,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


박서양(朴瑞陽, 1885~1940)190863일 제중원의학교 제1회로 졸업했다. 화학, 외과, 해부학 교수로 활동하던 중 간도로 떠났다. 이유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1917년 연길현 용지향(勇智鄕) 국자가(局子街)에 구세병원(救世病院)을 설립했다. 연길 내 유일한 양의사로 독립군과 그들의 가족을 무료로 치료했다. 그는 숭신학교(崇信學校)의 교장이기도 했다. 192012월경 적십자 소속 의사로, 19216월경에는 간도국민회 총부 군의로 활동했다. 북간도에서 한인 대상의 의료활동과 민족교육 사업을 주도했다. 박서양은 가장 억압받았던 신분 출신이었지만 의사로서 동포애를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군 군의관으로 헌신했다.

박서양과 홍범도의 대화다. 고종의 진료를 맡으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되었던 박서양이었다. 얻기도 어렵지만, 얻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내려놓는 일이었다. “후회하지 않겠소?” 누구보다 어렵게 조선에서 얻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만주로 온 박서양은 내게 대답했다. “후회는 지킬 게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요. 성도 이름도 없었던 제게 지킬 무엇이 있어서 후회하겠습니까” “그래도 이건 전쟁이고, 전쟁은 목숨을 내걸고 하는 것이오” “저는 사는 게 날마다 전쟁이었습니다나는 그에게 손은 내밀었다. “내 손은 적을 죽이느라 전쟁을 했는데, 그래도 당신의 손은 사람을 살리느라 전쟁을 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안중근과 홍범도의 대화다. “퇴로는 확보해야 하지 않소?” “퇴로는 필요치 않습니다” “수괴 한두 두를 잡는다고 전세가 달라지겠소?” 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안중근이 되물었다. “왜군 수백 두를 잡으면 전세가 달라집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제가 적의 수괴 한 두를 잡는다고 해서, 장군님께서 일본군 수백, 수천 두를 잡는다고 해서 물러날 일본이 아니겠지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지요” ‘臨敵先進 爲將義務(임적선진, 위장의무,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 것이 장수의 의무다)’ 안중근의 유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 시절의 지청천 장군(공훈전자사료관 제공) -
 

홍범도와 지청천((池靑天, 1888~1957)과의 대화다. “장군님도 독립이 되면 하시고 싶은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오, 라고 나는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포수는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자요, 무엇을 만드는 자가 아니오, 나는 부술 것만 확실히 부수고 갈 테니, 지사령관은 독립하는 그날이 오면 다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드시오” “그런 날이 올까요” “그날은 밤의 도둑처럼 올 것이오” “그 도둑이 오늘밤에 왔으면 좋겠습니다백무아의 언어 밤의 도둑처럼이 있다. 지청천은 19337월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함께 무장독립전쟁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다.

  

- 범도루트 대원들이 하얼빈 안중근기념관에서 안중근 참모중장을 추모하고 있다 -

범도의 방현석은 백년 전 홍범도와 백무아가 억압과 차별불의를 향해 발사한 마지막 한 발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착하지 않았다일격필살의 저격수였던 그들의 탄환은 빗나간 적이 없으므로 반드시 표적의 정중앙을 관통할 것이다라며 범도의 길은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있다.

무장독립전쟁에 나섰던 선열들은 일제의 총칼에 죽고고문에 죽고, 맞아서 죽었다.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었다. 흔적도 없이 죽어갔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좌절하게 않았다. 끝까지 싸웠다. 범도루트는 선열들이 투쟁했던 현장과 산화했던 역사, 즉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갔던 비범한 길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범도의 길, 만주 벌판 곳곳엔 장렬한 죽음의 지층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토양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진정한 독립 국가, 더 좋은 민주주의 나라로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24년 만주에서의 여름휴가, 그곳에서 만난 범도루트의 동지들, 그리고 방현석 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많은 시민들이 소설 범도를 읽고 범도루트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Comments

playgwangju 01.31 14:28
읽다보니 범도루트! 참가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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