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3년간 윤석열 정부 속에서 작년 말 12. 3 내란 사태를 겪었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났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태였다.
많은 국민이 이를 보고 느낀 의문은 왜 최고 학벌과 높은 지위의 공직자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반국가적 행태로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였을까 라는 점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불공정과 부정·비리가 횡행하고 있는 가운데 그 주역은 이 금수저 출신의 엘리트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인가. 이러한 배경에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파행적인 교육에 있다고 본다.
강남에서는 7세 고시라는 말이 유행하고 선행학습이라고 초등학생이 중학교 문제를 풀고 일찍부터 서울대를 목표로 준비한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끔찍한 소식도 들려온다. 교육이 아이들을 망치는 가운데 그 입시지옥을 거친 아이 중 소수는 명문대를 졸업하여 높은 공직에 진출하면서 기득권으로 편입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권력과 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인간이 아닌 괴물로 변해버렸다는 현실을 우리는 지난 세월 속에서 뼈아프게 경험하였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개혁이 필요하고 교육이 개혁되면 정치도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18세기 지식인 정약용 (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개혁론자였다. 그가 정치개혁의 수단으로 교육을 중요시한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당시 사회는 전국에서 탐관오리의 횡포와 백성의 피폐한 삶, 형식적인 과거제도로 유능한 인재라도 돈이 없고 소위 빽이 없으면 합격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노론이 자기네 사람을 합격시키거나 매관매직, 특정 인물에게 유리하게 시험을 내고 출신에 따라 차별하는 등 과거제의 문란이 일상적인 현실이었다.
과거시험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이를 통해 정적을 배척하고 자기 세력을 키우는 방식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실력은 있지만 출신이 미천해서 과거시험 대필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널리 인재를 뽑기 위한 과거제가 공정성을 잃으니 공직자의 기강은 해이해지고 돈으로 관직을 산 지방 수령들은 백성들에게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는 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民亂민란이 계속 일어났던 배경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부패한 정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위민정치를 실현하려면 올바른 품성과 능력을 갖춘 관료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 지방 관리의 덕목을 구체적으로 다룬 목민심서 사진:국립중앙도서관 >
한편 그는 교육 내용에 있어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한 실용 학문을 추구하였고 『목민심서』(청렴, 근면, 실천을 강조한 지방관의 지침서), 『경세유표』(조선의 정치제도에 대한 비판과 개혁안 제시) 『흠흠신서』(재판관의 공정성과 양심을 강조하는 형법서) 등을 저술하여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교육의 평등성을 주장하였는데 당대에도 오늘날과 비슷하게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의 관리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교육은 한양을 비롯한 가까운 지역의 양반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질 뿐이었다. 경화세족京華世族은 오늘날의 금수저 집안과도 같은 의미였다. 한양과 근처에 살면서 대대로 벼슬을 하고 지위가 높은 명문 양반 가문을 말한다. 그들은 독선생까지 두고 교육받은 후 과거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였다.
정약용은 지방 양반뿐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교육받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는 강진에서 18년의 유배 생활하는 동안 많은 책을 저술하는 한편 그 지방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였던 교육자였다.
그는 흑산도에 유배된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여러 명의 아동을 위해 서실書室을 열자 써 준 글에서 '어떤 누에든 세 번 자고 세 번 깨어나 실을 토해내 고치를 만든다. 조그만 잠박(蠶箔ㆍ누에 치는 채반)의 누에라고 해서 큰 잠박의 누에와 다르지 않다"며 교육자의 태도와 능력에 따라 흑산도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배우면 중국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의 「아학편兒學編」은 아동교육을 위해 쓴 책으로 아동들의 올바른 언어 사용과 도덕적 교양을 위한 학습서였다. 아동교육은 국가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라 생각하고 교육의 시작을 올바른 말과 인성仁性을 가르치는 데 두었다. 뿐만 아니라 지방 교육의 강화로 향촌 사회의 학교 운영과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지방 대학의 육성 문제를 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과거시험 합격에만 목표를 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도 현재 학교 교육의 목표가 서울대 혹은 SKY를 목표로 하는 입시에 매달리는 것과 닮아있었다.
정약용은 교육의 목표로 이루어야 할 덕德은 효孝, 제弟,자慈라고 제시하였다.
효는 부모를 애정으로 대하고 봉양하는 것이고 제는 형제끼리 우애하는 것이며 자기 자식 교육하는 것을 자慈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면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어찌 형제간에 우애가 있을 것이며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애정과 동정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결국 이웃의 존엄성과 평등을 인정하는 관계의 시작이 효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실천 지향의 교육, 효를 통한 공동체 의식 함양과 함께 일상 속에서 올바른 품성을 기르는 전인교육을 강조하였다.
한편 자慈는 가정의 규범을 넘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사회 윤리라 할 수 있다. 당시 유교적 통치이념에 따른 수직적 신분제 사회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따라서 목민관은 백성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교육시키는 역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효,제, 자를 실천하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재를 얻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그러나 인재를 얻으려면 반드시 먼저 가르쳐야 한다.(『경세유표經世遺表』)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한 점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한 점의 양심이 있어야 인간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약용은 유교적 도덕성을 정치의 기초로 보았고 교육은 도덕적 함양의 수단이며 인재등용에 있어 공정성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목민관은 도덕성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 기반은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점에서 정치개혁, 사회개혁과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표방하였고 “백성이 곧 하늘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치의 근본은 백성에 있고 교육은 백성을 깨우는 첫걸음이라고 보았다.
그는 실천적인 개혁가로 교육을 정치개혁의 뿌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18세기의 정치개혁과 교육 문제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당면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개혁은 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어른이 사라진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는 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