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이덕형 옮김/문예출판사
“우리가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될 수도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상적이고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며, 또 다른 이는 기술과 권력이 지배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떠올린다. 특히 핵전쟁, 환경 파괴, 인공지능의 통제, 인간성 상실 등으로 인해 인류의 종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미래의 비극을 경고한다. 오웰이 감시와 통제를 통한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를 그렸다면, 헉슬리는 쾌락과 안락에 순응한 채 자율적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묘사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는 과학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미래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어떻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작품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오오, 멋진 신세계!”라는 문장을 반어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포드’는 신처럼 숭배받는 존재이며, 헨리 포드가 대량생산 체제를 도입한 이후 632년이 지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는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표어 아래 단일한 세계국가 체제로 통일되어 있다.
이 사회에서 인간은 자연 출산이 아닌 ‘런던 중앙 인공부화·조건반사 양육소’에서 유리병 속에서 태어난다. 태아 상태에서 이미 계급이 결정되고, 조건반사를 통해 세뇌된 채로 자라난다. 계급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으로 나뉘며, 지능과 신체 조건도 계급에 따라 인위적으로 조절된다. 낮은 계급일수록 산소 공급이 줄어들고, 단순노동을 수행하도록 설계된다. ‘보카노프스키 법’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인간을 철저히 분업화된 톱니바퀴로 전락시킨다.
이 세계에서 결혼, 가족, 혈연은 사라졌으며, “만인은 만인의 것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무분별한 성관계가 일상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소마'라는 약물을 복용해 감정의 동요나 고통 없이 쾌락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고통, 갈등, 슬픔, 고민과 같은 ‘불편한 감정’을 제거하고 철저히 ‘안락한 삶’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에도 의문을 품는 이들이 존재한다.
버나드는 알파계급이지만 체격이 왜소하고 주변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마 없이 고통과 시련을 감내하고자 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고민한다. 존은 금지된 자연 출산으로 태어난 ‘야만인’으로, 셰익스피어의 책을 통해 인간의 정서와 영혼의 깊이를 동경한다. 그는 문명사회의 안락함보다 진실한 감정,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다움을 추구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육체의 고통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다가, 세상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불완전함과 함께 존재한다.”
- 올더스 헉슬리 -
작품 속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세계국가는 어린아이들에게 책과 꽃에 대한 혐오감을 학습시킨다. 책은 쓸모없고 지루한 것이며, 꽃은 불필요한 감정의 자극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헉슬리는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은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서 점점 둔감해지고, 진실보다는 가십과 오락에 빠져든다. 깊이 있는 생각보다는 가벼운 자극에 익숙해지고, 결국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간다. 우리가 좋아하고 익숙하게 여기는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조용히 지배하고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단지 소설 속 상상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과 SNS, 자극적인 영상, 무한한 소비에 익숙해진 채, 정작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나 인간성 회복에 대한 관심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편리함을 쫓아 기계에 의존하고, 불편을 견디지 못한 채, 고통을 제거하려는 욕망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멋진 신세계’가 그린 디스토피아적 현실로 성큼 다가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잃어가는 시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불편이 아니라 무감각이다.